《올해의 작가상 2020》,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서울
당신께,
오늘은 시간이 없어서 정작 보려고 했던 이승택 회고전을 반밖에 못 보고 나왔습니다. AG라는 단체에 속했던 작가의 개인전을 처음으로 보는 거라 엄청난 기대감을 가지고 갔기에 아쉬움이 꽤나 짙습니다. 부차적인 설명을 드리자면 AG는 1960년대 우리나라에서 생겨난 전위적인 미술운동입니다. ‘전위적’이라는 말이 힌트가 되었겠지만, ‘AG’라는 이름은 ‘아방가르드(Avant-Garde)’의 줄임말이에요. 또 유식한 말들을 늘어놓는다며 너무 다그치진 말아주세요. 아무튼 저는 이승택의 전시를 보러 이곳을 찾았지만 논란의 정윤석 전시도 놓치고 싶지 않아 그의 영상을 먼저 본 게 결국 화근이 되었어요. 그러나 정윤석이라는 사람 덕에 당신께 해드릴 말이 잔뜩 생겨서 곧바로 근처 카페로 가 자리를 잡고 펜을 들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오히려 좋네요.
지금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올해의 작가상 2020》이라는 전시를 하고 있는 건 이미 아시리라 믿습니다. 우선 같이 보러 가자고 해놓고 치사하게 혼자 봐버린 점은 미안하게 생각해요. 바로 눈앞에 있는 전시관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중 정윤석의 출품작이 특히 화제가 됐다고 말해드린 걸 기억하시나요? 러브돌을 주요 소재로 삼아서 영상을 제작했다는 작가 말이에요. 우리가 함께 본 기사의 주인공을 오늘 제가 보고 왔어요. 저야 전시를 여러 번 보는 게 익숙한지라 나중에 당신을 데리고 가 주저리주저리 설명해 드려도 상관없지만, 이 작품은 유독 할 말이 많아 이것들이 증발해버리기 전에 글로 정리해서 알려드리는 게 더 좋겠다 싶었습니다. 나중에 혼자서라도 전시를 보러 가실 때 이 편지를 챙겨 가시면 은근 도움이 될 거예요. 그러길 소망하며 적습니다.
전시 팸플릿에 적힌 설명에 의하면, 정윤석은 인간 존재에 실망함과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 대한 희망을 품고 사는 사람들이 인간의 대체물인 ‘러브돌’과 ‘AI’를 향유하는 모습을 영상에 담아 《올해의 작가상 2020》전에 참가하였다고 합니다. 솔직히 전시를 보기 전에는 러브돌과 ‘동거’하는 사람이 인간 존재에 희망을 가진다는 걸 어떻게 보여줄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영상과 더불어 작가의 인터뷰를 본 후에는 이를 이해할 마음조차 버리게 되었습니다. 특히 러브돌 영상이 그랬습니다. 발가벗은 채 러브돌과 함께 목욕을 하고, 심지어는 그것과 성관계를 가진 직후로 보이는 장면까지 적나라하게 보여주지만 이는 그저 혐오감만을 야기할 뿐이었습니다. 특히 밸런타인데이에 혼자서 볼 영상은 더더욱 아니더군요. ‘인간 불신’과 ‘인간 지향’을 동시에 가진 인간의 모순점을 보여주고자 했다는데 영상에서 보이는 건 그저 ‘인간 지양, 러브돌 지향’뿐이었어요. 요컨대 러브돌이라는, 자극적인 소재가 가진 위험성을 감수할 만큼 인간관계의 모순점이 명확하게 전달되지 않는다고 느꼈습니다.
AI를 다룬 영상은 그나마 볼만 합니다. 그러나 이 경우도 “인간관계에 대한 인간의 모순을 잘 드러냈느냐”라는 질문과 맞닥뜨려야 한다면 고개를 끄덕이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작가는 일본의 정당 중 AI로 법안을 제정하고, 급기야 ‘정부의 모든 행정 업무에의 AI 도입’을 일종의 모토로 하는 정당을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인간이 이기적이기 때문에 온전히 국가를 위한 정치를 하기 어려운 존재라고 믿더군요. 사실 저도 그들의 생각이 아예 틀린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AI에게 정치를 '맡겨야 한다’는 그들의 의견에 대해 옳다고 말할 용기까지는 없네요. AI를 신뢰하지 못해서인지 인간의 힘을 양도하는 것에 반감을 느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떤 이유에서건 저도 인간이라는 존재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는 없나 봅니다. 각설하고, 해당 영상이 인간관계의 비관적인 모습을 명확히 보여주는 건 확실히 인지할 수 있었어요. 그러나 이 작품이 ‘인간관계의 모순’이 되기 위해선 인간관계의 희망적인 면모도 함께 다루어야 그 의미가 정립될 수 있는데, 저의 짧은 이해로는 이를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정치라는 이름의 복잡하고 거시적인 인간관계를 AI로 대체하겠다는 것과 인간관계에 대한 일말의 희망을 품는 것은 엄연히 다르니까요.
결국 저는 작가가 이 영상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바를 파악하지 못하겠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매춘을 러브돌로 대체하고 부패한 정치인을 AI로 대체함으로써 도구를 통해 인간관계의 윤리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이런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것 같지도 않고 –저는 이 메시지도 사실 별로라고 생각합니다- 그냥 ‘인간이 가진 윤리적인 모순점’이라는 말로 이 영상을 포장하는 게 다소 무책임하다고 느꼈습니다. 자극적인 매개를 활용한 것에 비해 내용 전달이 제대로 되지 않아 아쉬웠달까요.
제가 이 전시를 보고 급히 당신께 편지하는 이유는, 모든 전시가 아름다운 환상을 보여주는 건 아니라는 걸 알려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저도 ‘불편한 전시’를 오늘 처음 경험해보았기에 더욱 생생하게 전달해줄 수 있으리라 기대하며 펜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제가 본 이 전시는, 마네와 같은 화가들이 당시에 연출한 ‘불편함’ 과는 거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당신들이 살던 시대보다 더욱 앞서 나간 관점으로 작품을 제작하였기에 대중의 불편함을 야기한 ‘아방가르드’였습니다. 예컨대 <풀밭 위의 점심 식사>는 그것이 제작될 당시에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수많은 비판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당시 신화 속 인물에게만 허락된 누드라는 장치를 매춘부에게 사용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정윤석이 영상을 통해 만드는 불편함도 아방가르드라고 할 수 있을까요? 과연 러브돌이라는 소재가 전위적인 것일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부디 아니길 바랍니다. 몹시도 간절히 말입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작금의 우리가 외설이라고 부르는 이 영상이 후에도 예술로 인정받지 않기를 바랍니다. 저를 꼰대라고 생각하셔도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폭력적인 욕구를 채우기 위해 만들어진 물건이 예술의 수단으로 여겨지는 게 당연시되는 날이 온다면, 저는 제가 그토록 사랑하는 예술을 포기할 각오까지 하며 이 말을 내뱉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께 저의 생각을 주입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한편으로는 얼른 전시를 보셔서 저의 이런 생각에 반박해 주시길 바라고 있기도 합니다. 당신과의 대화는 저에게 즐거움만을 선사하니까요.
아울러 이 편지가 당신으로 하여금 전시에 대한 기대를 키웠다면 저는 무척 기쁠 것 같습니다. 그것이 편지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당신께 또 하나의 이야깃거리를 던질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오늘의 관람은 꽤나 만족스러웠다 할 수 있겠습니다. 이승택 전시는 다음에 또 가서 보면 되는 거니까요. 그때는 당신과 함께 작품을 마주하고 있길 바라요.
승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