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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량한 Feb 28. 2024

대형 교회의 쓸모

이 많은 돈을 어찌할 것인가

교회가 돈이 많다는 것은 커다란 딜레마다.

예수님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두고 ‘약대(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셨다.

(마태복음 19장 24절, 마가복음 10장 25절, 누가복음 18장 25절)


돈을 많이 가진 것 자체가 문제다. 앞선 말씀 전의 상황을 보자.

예수님은 부유한 청년이 가르침을 구하자 ‘가진 것을 다 팔아 모두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 청년은 그 말을 듣고 근심하며 돌아갔다.


‘돈이 많은 교회’라는 것은 애당초 성립할 수 없는 말이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는 사람은 부를 쌓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돈 많은 대형 교회는 엄연히 존재한다.

그래서 모든 대형 교회는 딜레마를 짊어지고 있는 셈이다.

예수님 말씀대로라면 가진 돈을 모두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가난을 지향해야 한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것만큼 어려운 일이 또 있겠는가.

그래서 성경 속 청년처럼 근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매주 쏟아져 들어오는 엄청난 양의 헌금은 어떤가.

시간이 지날수록 근심의 무게만 더해진다.

(대형 교회가 되기를 거부하고 29개 교회로 분할시켰던 분당우리교회의 선택이 수긍이 되는 지점이다.

물론 아무런 문제의식이 없는 대형 교회도 분명히 있다.

그들은 나름대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고백하고 있는 셈이다)



대형 교회는 교회가 돈이 많은 것에 대한 정당성을 획득해야 한다.


‘그 많은 돈은 무엇을 위함인가?’


이 질문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지 못한다면

그 교회는 더 이상 교회의 역할을 잃고 만다.

어쨌거나 풍요가 생겼으니 뒤늦게 이유를 찾는다.

그 이유는 정체성과 존폐가 걸린 중대한 문제다.

대형 교회가 대형이어야만 하는 이유에는 뭐가 있을까?


우선 ‘구제 사역’을 이유로 들 수 있다.

대형 교회는 작은 교회는 상상할 수도 없는 규모로 어려운 이웃을 도울 수 있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 궁극적으로 교회의 모든 재산을 나눠주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고,

구제란 것이 작은 교회 차원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불충분한 감이 있다.

중요한 것은 교회의 본질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대형 교회만이 할 수 있는 대규모의 일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구제의 본질은 규모가 아니라 사랑이다.

교회가 자랑할 만한 일은 아니지 않은가.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마태복음 6장 3절)



두 번째로는 ‘복지’를 들 수 있다.

대형 교회 특유의 거대한 건물을 활용한 복지를 생각해 보자.

장애인들을 위한 장애인 배려석, 승강기.

외국인 성도를 위한 통역 시스템.

아기를 가진 어머니들을 위한 수유실, 유모차 대여 같은 것들이 여기에 속한다.


이 모든 것은 대형 교회가 계속해서 새로운 건물을 건축하는 이유기도 하다.

성도들의 머릿수가 늘어남에 따라 건물은 점점 더 커지고 부속 건물은 늘어만 간다.

사회적으로 지탄받는 대형 교회의 외형은 이렇게 이뤄진다.

역시 교회의 본질과는 맞지 않는다.



또 다른 방향으로는 복지 프로그램을 들 수 있다.

유소년을 위한 공부방 운영, 방과 후 돌봄,

청소년들을 위한 레크레이션, 외국어 교육,

시니어 교육, 예비부부나 예비 부모를 위한 교육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같은 복지는 작은 교회도 사랑과 관심으로 어느 정도 할 수 있는 일이다.

어차피 이런 프로그램들이 ‘무급’ ‘봉사’ 인력에 기대고 있는 점은 작은 교회나 대형 교회나 다르지 않다.

이 또한 교회의 본질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교회의 복지는 부가적으로 따라오는 일에 가깝다.

복지도 중요하지만 핵심은 아니다.

교회에는 복음이라는 더 중요한 부분이 있다.


그렇다면 전도, 그중에서도 선교를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일반 전도는 작은 교회에서도 할 수 있다.

국내 선교까지도 작은 교회가 도전할 만한 일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가지고 있는 대형 교회는 그런 작은 규모에 그칠 수가 없다.

해외 선교라면 작은 교회들이 도무지 넘볼 수 없는 대형 교회들만의 영역이다.


대형 교회(의 경제력으로)만 할 수 있는 일이자,

교회의 본질을 해치지 않는,

‘돈이 많아도 되는 이유’를 발견한 것이다.


이 때문에 많은 대형 교회는 엄청난 예산을 해외 선교에 투입한다.

여전히 무급 봉사 인력에 기대고 있고,

매 선교마다 따로 선교 헌금까지 거둬들이고 있지만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해외 선교로 인해 얻게 되는 명분이기 때문이다.

대형 교회마다 해외 선교가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이유다.

대형 교회는 교회의 규모에 맞게 해외로 눈을 돌리고,

활동 반경을 나라 밖으로 넓히려고 노력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당성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해외 선교는 또 다른 의미에서의 ‘사명’인 것이다.



해외 선교에서 핵심 인력들은 20대, 혹은 30대의 젊은이들이다.

특히나 20대의 대학생들은 그중에서도 핵심을 이룬다.

휴학 중이거나 방학 중이거나 취업 준비 기간일 그들은

상대적으로 시간적 여유가 많으며

건강한 체력을 가지고 있고,

먹여 살릴 딸린 식구가 없으며,

해외에 대한 호기심과 선망을 가지고 있다.

해외 선교에 이만큼 적절한 인력도 없는 것이다.

대형 교회 안에서 이들은 중요한 대접을 받는다.


뒤늦게 이유를 갖다 붙인 면이 없진 않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면피는 한 셈이니 다행이라고 봐야 할까.

하지만 이 대규모 선교 활동에서도 나는 일말의 피로감, 권태감을 감지하게 된다.

여전히 해마다 엄청난 양의 돈이 들어오고 있고,

여전히 부속 건물은 새로 지어지고 있고,

사람들은 더 많이 몰리게 된다.

해외 선교라는 방패 하나로 다 설명하기에는 버거운 실정이다.

엄청나게 늘어나 버린 자본은 교회의 규모를 팽창시킨다.

터질 듯이 빵빵하게.


나는 대형 교회의 쓸모를 오히려 전혀 엉뚱한 곳에서 찾게 된다.

대형 교회의 규모는 대도시의 익명성을 닮았다.

대도시 안에는 너무 많은 사람이 함께 살고 있고,

너무 많은 인파 속에 존재하는 개인은 때때로 소외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 안에서만 느낄 수 있는 안정감이라는 것이 분명히 있다.

아무도 나를 모르고,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는다는 면에서 오는 자유로움.

그것은 오로지 예배와 하나님과 나의 관계에만 집중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이 아닐까.

그것은 분명 작은 교회가 성도에게 줄 수 없는 이점이다.

물론 그것이 교회의 본질에 맞는 것인지는 더 생각해 볼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존재 이유를 찾아 위태롭게 지탱하고 있는 대형 교회의 고민은 완료되지 못한 것 같다.

모쪼록 그들이 확고한 하나님의 뜻을 찾았으면 좋겠다.

아니면 하나님의 뜻에 따라 모든 재산을 나누어주고….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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