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스틱 Jun 08. 2024

고백

나는 알콜 중독자다

1. 난 알콜 중독자다. 4년 전, 글쓰기로 치유가 됐다고 믿었건만 아니었다.      

처음 술을 입에 댄 건 중학교 2학년 때였다. 하교 중 시장에서 만난 아버지가 날 지하 중국집으로 데려갔다. 좋아하는 자장면이나 사줄 줄 알고 들떠 있었는데 소주를 한 병 시키시더니 사발 가득 따라 주셨다. 장남에다 중학생이니 나도 이제 어른이 되었다는 일종의 ‘성인식’이었다. 고등학생 시절 일탈을 한답시고 내가 마신 술의 양을 봐도 우리 집은 대대로 술고래 집안이다. 그러나 그건 젊은 시절 일탈이고, 본격적으로 술을 마신 건 영상제작 일을 하면서부터다. 철야를 밥 먹듯 하는 데다 일 중에도, 일이 끝나도 술은 늘 밥과 함께 차려지는 게 업계 전통(?)이었다. 지금이야 안 그러겠지만 촬영 후 술을 안 사주면 강짜를 놓는 ‘곤조 스텝’들도 많았다. 그러나 그것도 업계 관행일 뿐이지 타고난 예민함과 쉽게 긴장하는 소심함, 완벽주의까지 술을 부르는 모든 성격을 다 갖춘 나는 다행인지 불행이지 왁자지껄 술 먹는 걸 싫어해서 회식 도중 빠져나와 홀짝홀짝 혼술을 했다. 다음날 촬영이 잡힌 경우 혼술을 하지 않으면 긴장을 풀지 못했다. 맥주를 홀짝거리며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현장 변수를 예상하며 완벽한 촬영계획을 세우는 재미에 빠졌는지도 모르겠다. 바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맥주를 홀짝거리는 맛도 그렇게 좋았으니 말이다. 그런 생활을 10년 이상 하고 나니 언젠가부터 술 없이 잠을 잘 수가 없게 됐다.    

  

다들 그런다. 술을 끊으라고.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생각한다. 술로 인한 손해를 가장 많이 본 사람이 단지 술이 좋아 안 끊는 줄 아나? 나뿐 아니라 다른 알콜 중독자들에게도 의지만 있다면 누구나 단주를 할 수 있듯이 부디 의지의 문제로 비아냥대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건 단주를 위해 각고의 노력 중에 실패하고 다시 도전하고 있는 수백만 알콜 중독자들의 의지를 무시하는 처사이자 그들 노력에 대한 폭력이다. 그래서 묻고 싶다. 단주가 의지만으로 될까? 아직 주위에서 본 적은 없지만, 누군가 있다면 그는 극소수의 극강의 의지력의 소유자일 것이다. 내가 이렇게 장담하듯 말하는 이유는 내가 겪은 알콜 중독자 (알콜 의존증 환자라고도 한다만 편의상 중독자라 하겠다.)들 사례가 의지만으로 단주를 하기가 상상 이상으로 얼마나 힘든지 실제 보고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중증의 불면증 환자라는 걸 모르고 그저 알콜 중독자라고만 알고 있었을 때 알콜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다. 같은 병실을 쓰는 네 살 많은 형이 있었는데, 그 형이 그 병실에서 가장 오래 있었기 때문에 방장이었다. 그 방장 형은 훤칠한 키에 매사 흐트러짐이 없어 병동 사람들 모두와 의사, 간호사들에게 존경까지 받았다. 결혼을 해서 아내와 세 살배기 아이도 있던 그 방장 형은 입, 퇴원을 반복하며 한 병원생활만 5년이었다. 아내와 아이가 보고 싶어 화장실문을 잠그고 큰 덩치를 들썩이며 흐느끼던 그 형은 다시 술을 먹으면 혀를 깨물겠다, 이번에 또 술을 먹으면 아내와 아이를 포기하겠다고 까지 다짐을 하곤 했다. 성실까지 해서 병동생활에 늘 솔선했으며 새벽 여섯 시면 일어나 체조를 하고, 방장임에도 하루도 빼먹지 않고 병실청소를 도맡아 했다. 누가 봐도 알콜 문제가 있으리라 상상할 수 없는, 지극히 평범하고 성실한 그 방장 형도 몇 달 만에 외출이나 외박이 주어지면 술에 취해 들어왔다. 중독 초기에는 술에 대한 갈망 때문에 그렇다지만 병원에 몇 개월이나 몇 년 갇혀있으면 아예 술맛을 잊을 만도 할 텐데 문제는 퇴원을 하고 단주를 하며 잘 지내다가도 일이나 친교 등 소위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술잔이 앞에 놓이게 되고 가까스로 참다가도 어느 순간 한 번 입에 대면 그간의 단주 생활이 한 번에 무너진다고 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세 살배기 아이가 눈에 밟혀 이를 악물고 음주 욕구를 참지만 회사 또는 경제문제 등 스트레스를 넘지 못해 ‘딱 한 잔만'하게 되면 단주 결심이 무너지는 건 순식간이라고 했다. 오죽하면 토끼 같은 아내와 한참 재롱 피울 아이를 보면서 기어이 술을 끊고 말겠다고 수천, 수만 번 다짐하지만 또 무너져 입원했다가 몇 개월 후 퇴원했다가 다시 몇 개월 후 다시 입원을 반복하겠는가. 그의 얘기를 들으며 술 끊겠다고 입원한 주제인 내가 눈물이 났다. 


그 외 병동 사람들과 대화를 많이 해본 결과, 그 중독의 힘은 실로 놀라워서 몇 개월 동안 술을 외면하며 잘 버티다가도 마치 걸리기를 바라듯 직장, 가정 등 사회 도처에 놓인 덫에 딱 걸려들면 몇 개월, 몇 년의 단주 생활은 한순간에 무너진다고 했다. 집에 우환이 닥치거나 직장에서 감당키 힘든 스트레스에 직면했을 때 알콜을 섭취하면 호흡이 곤란한 체질이 아닌 이상 의지로 술을 외면하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했다. 내가 병동에서 만난 수 십 명의 중독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입, 퇴원이 반복되는 이유였다. 병동 내에서 나보다 젊은 사람이든 나이 든 사람이든 저렇게 사회생활하면 어떤 직장에서건 환영받을 거라 믿길 만큼 다들 성실했다. 새벽 5시면 기상해 병실 청소를 하고 복도를 걸으며 작게나마 운동을 하고 식사 후 또다시 운동을 했다. 2L 페트병에 물을 담아 아령으로 쓰며 힘차게 복도를 활보하기도 하고 비좁은 침대 사이에서 푸시업을 했다. 정확한 시간에 정자세로 글을 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도서관에서 금주 관련 책을 잔뜩 빌려 놓고 필사를 하는 이도 있었다. 그들은 복도에 국물자국만 있어도 걸레를 빨아 직접 닦았으며 청소용역이 있는데도 화장실 청소와 분리수거까지 했다. 그건 누구의 지시도 아니었고 오로지 본인의 몸과 마음을 닦기 위한 일종의 수행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성실히 자기 관리를 하고 마음을 닦아도 퇴원하면 두어 달 안에 비틀거리며 또 입원을 했다.      


난 그들과 많은 대화를 한 후 강한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이곳 알콜 병원이란 곳은 가둬놓은 시간만 술을 못 먹을 수밖에 할 뿐 근본 치료가 가능하긴 한 건가? 입원초기 처방하는 항 갈망제 역시 초기 금단 증상을 줄이는 효과가 있을 뿐, 밖에 나가서 겪는 술의 유혹까지 예방하지는 못한다는 말은 의사도 했다. 유명한 단주 모임 A.A에서 강사들을 초빙해 단주 강의를 하는 걸 들은 적이 있는데, 그들도 과거엔 똑같은 패턴이었다. 100일, 200일.. 서로 독려하고 칭찬하며 금주 생활을 하다가도 집안에 우환이 있거나 사회생활이나 가정생활에 위기가 닥치면 당장의 마음을 달래는데 술만 한 것이 없어 단주 생활이 끊기는 경험들을 다들 했다고 했다. 특히 한 강사의 사례는 극단이었다. 가정과 사회생활 모두 술에 파괴당하고 본인도 삶을 놓아 버리려고까지 했으나 독한 의지로 십 년 넘게 단주를 실천하고 있다고 했다. 당연히 단주 모임의 효과도 곁들였다. 그런데 난, 그의 의지가 대단하다고 생각되면서도 과정이 생략된 채 의지만 강조된 강의가 아닐까 의구심이 들었다.  

    

‘과연 의지만으로 평생 단주를 실천할 수 있을까?’      


그런 독한 의지를 누구나 지니고 있는 건 아니니까. 의지는 소모되는 거라 매일 같은 양의 의지를 불태울 수는 없다고 믿으니까. 금연을 의지의 문제보다 질병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사회적 인식도 같은 맥락이라 생각됐다. 무조건 의지만 강조할 게 아니라 차라리 실천 확률 높은 ‘요령’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만난 병동의 수십 명은 그런 의지가 없어 입, 퇴원을 반복하는 것일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엉뚱하게도 하루, 일주일, 한 달, 육 개월..이렇게 본인의 단주 기록을 세는 것이 때론 독이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몇 년 동안 단주를 실천하다가도 그야말로 ‘어쩌다 한 번’ 술을 입에 댄 게 열패감과 자책으로 이어져 어차피 실패한 마당에 더 지속할 필요를 못 느끼는 자포자기 심정이 된다는 건 단주 일수에 집착한 결과가 아닐까? 처음 계획할 때야 단주 일수를 세는 성취감이 있겠지만 언제고 한 번 마시면 그걸로 수포로 돌아가는 계획. 한번 넘어진 단주라는 계획이 곧장 의미를 잃어버린 단어로 바뀌는 계획은 너무 허망한 계획 아닌가? 일수를 세며 의지를 확인하는 것보다 넘어지면 다시 시작하는 지속력이 더 중요한 거 아닌가? 한두 달 단주를 하다가 어찌해서 술을 먹게 되면 훌훌 털고 다시 단주를 시작하는 게 낫지 그간의 모든 노력의 의미가 증발된 듯 단주 의지가 완전히 무너지는 건 오히려 기록하지 않은 만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불굴의 의지가 없는 사람은 꼭 단주만을 목표로 삼기보다 절주부터 시작하는 게 낫겠다.'   

   

어느 날, 거울에 비친 나를 바라보다가 이런 판단이 들었다. 그 불굴의 의지가 없는 사람, 그게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나란 인간은 본디 독하지를 못해서 어떤 목표를 세울 때 일단 작게 잡고 본다. 그리고 단계를 높여가며 끈질기게 매달리다 보면 목표 근처에라도 간다. 나란 놈이 그러하니 남들처럼 거창하게 단주를 결심하기보다 내게 맞는 전략과 전술을 택하기로 했다. 거창한 목표 앞에서 좌절하느니, 차라리 가능한 절주를 목표로 삼기로 했다. 먼저, 알콜 중독이 문제라면 더 강한 것에 중독되기로 했다. 해로운 중독을 이로운 중독으로 덮는 것. 

'삶에 활력을 주고 뇌가 진취적으로 회전할 비타민 같은 활동 찾기. 그리고 그것에 기대어 성취감을 얻기.' 

그걸 전략으로 삼았다.      


전술을 짤 때도 나답게 가능한 작은 걸로 세웠다. 

처음엔 일주일에 한 번 주말에 한해서만 마실 것을 목표로 했다. 마시면 안 된다는 자아와 싸우며 죄스런 마음으로 마시느니 한 주간 잘 참았다는 칭찬과 함께 보상차원에서 주말에 맘 편히 마시는 것이다. 단, 기분이 좋아질 만큼만. 그 이상이 되면 다음 날의 숙취가 또 술을 부르는 건 경험으로 아니까. 주말에 맘 편히 마실 수 있다는 기대가 있으니 확실히 평일 동안 술에 대한 갈망이 낮아졌다.     

계획대로 한주를 보내고 주말에 스스로 허락한 술을 마시니 죄책감이 없어지고 자존감이 올라갔다. 그간 뇌가 얼마나 술에 쩔었는지, 그렇게 한 달을 보내고 나니 전에 없이 머리가 맑아지고 몸이 가벼워졌다. 머리가 맑아지니 없던 의욕과 생기가 돌고 부정적 감정보다 긍정적 감정이 많아졌다. 오랜만에 그런 맑고 진취적인 상태의 맛을 보고 나니 금세 그 쾌감에 중독됐다. 한주를 계획대로 보냈다는 쾌감이 반복되니 불가피하게 과음을 했다가도 술에 취한 알딸딸한 기분보다 그 맑고 긍정적인 심리 상태를 더 갈망하게 되고 다시 술을 찾기보다 얼른 제자리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적어도 알콜 중독을 쾌감 중독으로 덮은 단계까지는 성공한 것이다.       

역시, 커다란 성취보다 작은 성취의 반복이 더 효과적이었다. 긴장을 요구하는 상황이 닥치거나 불안하게 했던 촬영 변수, 촌각을 다투는 방송시간에도 나도 모르게 여유가 생겼고 어김없이 술을 부르던 우울하고 슬픈 감정 속에서도 술이 생각나지 않았다. 술에 대한 욕구가 차지하고 있던 자리를 쾌감으로 충족하고 싶은 욕구를 확실히 느꼈다. 그렇게 몇 개월 동안 뇌를 청소했더니 정말이지, 새로 태어난 기분이 됐다. 그러나 그런 기분에 익숙해지고 무뎌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두 번째 전술을 펼칠 때가 된 것이다.  


술보다 강한 중독성과 쾌감을 느낄 수 있을 기댈 것을 찾아 여기저기 기웃거릴 때, 우연히 ‘글쓰기 수업’이란 책을 읽게 됐다. 저자는 퇴직 후 글쓰기로 인생 2막을 열었다고 했다. 근사했다. 그와 같이 퇴직은 아니지만 프리랜서라는, 반 백수인 내 처지와 똑같다고 스스로 우겼다. 그때 나는 무엇이든 기댈 것이 절실했으니까. 그 책이 일러준 글쓰기의 장점이 어쩌면 내게도 새로운 인생을 열어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었다. 그래서 무작정 따라 하기로 했다. 그래서 무작정 썼다. 일기부터 해서 없는 애인에게 보내는 편지까지 아무거나 마구 썼다. 예상대로 재능은 없으나 재미가 있었다.  내 과거를 소환해 노트북 화면 위에 옮겨 놓으면 웃기고 아팠던, 잊었던 감정들이 요동치며 살아나는 게 재밌었다. 당장의 우울하고 심란한 감정도 자판에 털어놓으면 객관화되고 정리되는 게 신기했다. 무언가 중독되어 기댈 곳을 절실히 찾을 때 무엇보다 재미를 중시했던 이유는 재미를 통해 지속성을 확보하고자 했던 것인데 그 판단은 적중했다. 그렇게 쓰는 재미에 빠지다 보니 어느새 내 얘기를 누군가 들어줬으면 싶어 졌고 그러기 위해 더 잘 쓰는 연습이 필요해졌다. 자연스레 남들은 어떻게 썼나 궁금해지고, 그 호기심은 아침마다 책을 여는 습관이 됐다. 책을 통해 남들의 삶을 들여다보던 눈은 내 삶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게 했고, 술에 쩔어 흐리멍텅하게 지낸 시간들이 뼈아프게 후회됐다. 

    

뭔가에 몰입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는 것은 분명, 흔적 없이 사라졌던 자존감을 다시 살려 내는데 충분했다. 언제부턴가 맑은 정신과 맑은 마음가짐 상태일 때 잘 써진다는 것과 쓰고 싶은 의욕이 팍팍 생기는 것도 알게 됐다. 그래서 맑은 심신상태를 위해 아침, 저녁으로 명상을 했다. 재밌는 걸 더 잘하고 싶으니 그 상태를 유지하고 싶고, 술 먹을 시간이 아까워지니 꼭 필요한 술자리라도 다음 날 숙취를 줄이기 위해 절주를 하게 됐다. 일주일에 한 번, 주말에 마시던 술은 의지를 발휘하지 않아도 2주에 한번, 한 달에 한 번, 석 달에 한 번으로 횟수가 저절로 줄었다.   

   

운동을 할 때도 동료들과 서로 격려하며 실력을 겨루다 보면 조금씩 발전하는 자신을 발견하는 재미에 중독되듯 글쓰기를 잘하고 싶은 단계에 들어서자 더 나아지고 싶은 욕구 때문에라도 술 따위에 시간을 뺏기는 것이 정말 아까워졌다. 그렇게 나는 ‘좋아하는 것에 심취하기’로 술을 조절하는 데는 성공했다.      


‘술을 정복하려 하지 말고 습관을 정복하라.’ 


이것은 내가 4년 전 삼사 개월씩 술을 잊고 살 때 책상 앞에 써 붙여 놓은 문구다. 

그런데..     

-다음 얘기는 고백 2에서...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왜 사랑이란걸 못해봤을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