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나쁜 사람은 안경을 씁니다. 그렇다면 머리가 나쁜 사람이 쓰는 것은 뭘까요? 정답은 모자입니다. 그래서 저는 모자를 쓰지 않습니다. 모자라지 않기 때문이죠.
모자란 사람은 모자를 쓴다.
나는 모자를 쓰지 않는다.
고로 나는 모자라지 않은 사람이다.
절대로 모자가 안 어울려서는 아닙니다. 적어도 제 눈에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모자를 쓴 저를 보고는 아내가 한마디 합니다. 당신은 모자가 정말 안 어울린다고. 모자가 안 어울린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남들이 보기에는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그깟 모자 어울리면 어떻고 또 안 어울리면 어떻겠습니까. 그저 다 같이 어울려 살 수만 있다면야.
사실 스스로도 모자가 안 어울린다고 생각하며 살아오긴 했습니다. 그래서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자를 쓰는 일이 없었는데 가령 보이스카웃 활동을 할 때나 예비군 훈련을 갈 때와 같이 어쩔 수 없이 집단의 규율을 따라야 할 때 모자를 썼습니다. 머리 감기 귀찮아서 모자를 쓰는 사람들을 보면 내심 부러웠습니다. 모자를 쓴 모습을 보일 바에야 머리를 안 감은 모습을 보이는 게 차라리 낫다고 생각할 정도였으니까요. 이제 보니 모자란 사람이었네요. 고로 모자를 썼어야 했고요.
지금은 때때로 모자를 씁니다. 운동을 하러 나간다던가 마트에 장을 보러 간다던가 할 때 개의치 않고 모자를 씁니다. 더 이상 외모에 신경 쓰지 않는 나이가 돼서 그런 거 아니냐고 물으실 수 있지만 반은 맞고 반은 틀렸습니다. 외모에 신경 쓰지 않는 건 맞지만 그건 나이와 상관없는 일이니까요. 더 이상 잘 보일 사람이 없어서 그런 거 아니냐고 물으실 수 있지만 반은 맞고 반은 틀렸습니다. 이성에게 잘 보일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아내에게는 (가끔) 잘 보이고 싶으니까요.
그저 모자를 쓴 저도 저이고 모자를 안 쓴 저도 저니까요. 그깟 모자가 저를 규정할 수는 없는 거죠. 그러고 보니 지난날에 저는 스스로가 모자라다고 생각했던 사람이었나 봅니다. 박명수를 닮았다는 소리도 듣고 자랑할만한 직업을 가진 것도 아니고 특출 난 장기를 가진 것도 아니었거든요. 외모도 모자라고 가진 것도 모자란다고 생각했던 거죠. 남들 눈에도 그렇고 심지어 제 자신의 눈으로도 그렇게 보았으니, 나 원참 콤플렉스 투성인 사람이었네요. 그래서 그깟 모자 하나에도 흔들렸거죠.
물론 그렇다고 지금 박보검처럼 잘생겨졌거나 일론 머스크처럼 부자가 됐다거나 허니 제이처럼 춤을 잘 추게 된 건 아니에요. 단지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게 된 거죠.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나으면 나은대로 그저 있는 그대로. 비록 모자는 잘 안 어울리지만 안경은 잘 어울려요. 잘생기진 않았지만 아내에게 사랑받고 있어요. 부자는 아니지만 치킨이 먹고 싶을 때 고민하지 않고 시킬 수도 있죠. 춤을 잘 추는 건 아닌데 그래도 스텝은 조금 밟아요. 더 이상 타인과 저를 비교하며 움츠러들지 않아요. 세상의 모든 것들이 저마다의 쓰임이 있듯 제게는 저만의 매력이 있으니까요. 이걸 깨닫는데 시간이 조금 걸렸네요. 때로는 마음 아프고 때로는 스스로를 원망했을 예전의 저에게 심심한 사과의 말씀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