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청춘이였다면 일말의 고민도 없이 문을 따고 들어갔겠으나 지금의 나는 도저히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결혼을 해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라면은 소화가 잘되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소화기관들은 34세를 기점으로 정년퇴직한 은퇴자처럼 혹은 파업한 노동자처럼 제 역할을 해내지 못하고 있다. 더군다나 최근 과도한 업무 스트레스로 면역력까지 바닥을 친 상황에 라면이라니. 친절한 금자씨 미안해요.
"너나 잘 드세요."
그렇게 영애씨의 유혹을 거절하고 나는 아내의 손을 잡고 엄마집으로 향했다. 어느새 초복이 왔기 때문이다. 한병철의 저서 '리츄얼의 종말'을 읽고 나서부터는 의식적인 행위들에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복날이 뭔 대수냐, 가 아니라 복날이면 모름지기 보양식을 먹어야지,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라면 금상첨화이고. 복날이라든지 환갑이라든지 투투라든지 결국 인간은 지루한 날들 속에서 지치지 않기 위해 특별한 날들을 만들어낸거겠지, 어떻게든 살아가려고. 인간은 귀엽다.
밖에서는 36세의 만년대리 아재지만 적어도 엄마에게는 귀여운 아들이겠지, 그런 아들이 복날이니 삼계탕을 해달라고 하면 엄마도 기쁜 마음에 해주겠지, 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엄마도 어느덧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인데 한여름에 낡은 주방에서 몇시간동안 닭을 삶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아들을 위해 며느리를 위해 바람도 잘 들지 않는 주방에서 능이를 넣고 삼을 밤을 대추를 쌀읗 넣고 몇시간을 끓이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 것은 그만큼 엄마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이겠지. 엄마의 삼계탕이 토속촌 삼계탕보다 맛있는 이유는 바로 엄마의 사랑때문이겠지.
곧 중복이 올거고 머지않아 말복이 올텐데 나는 또 엄마를 찾겠지. 그때는 좋은 음식을 대접해야지. 그리고 또다시 초복이 오면 엄마에게 삼계탕을 끓여달라고 졸라야지. 그렇게 함께 나이를 먹어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