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rtrait in Jazz - Bill Evans
Blue in green;
지루함, 비루함 - 고루함에 가까운 비언어적 감정이 감싸안았다. 전에는 사람들이 말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타자들이 떠올릴 무언가를 나의 주관 속에서 부풀리며 겁내는 것이었다. 사람이라고 설정한 대상들이 사실 나의 소타자적 욕망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허탈함이란, '남들'이라는 것은 모두가 각자의 인식계에서 만들어낸 또 다른 자기 자신일 뿐이다.
놓이지 않은 것, 흐트러지는 것, 그리하여 웅측되지 않고 줄곧 어딘가로 빠져나가는 듯한 것. 어쩌면 인간들은, 아니 인간이라는 나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미 빠져나간 뒤인지도 모른다. 정립을 지속하더라도 자재의 부족으로 하나 둘 무너지기 시작하는 마음의 성. 사람들은 그것을 나르고 우리는 그것을 세우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여전히 결여되어 있다. 결여되어 있다. 그러한 감정이 강하게 머리를 울린다.
감정이 척추를 타고 올라갈 때의 불쾌감이 있다. 그것이 뇌에 영향을 미칠 때의. 감정만큼 무의미한건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되려 나의 변연계가 너무 발달했기에 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차라리 미미한 무언가였다면, 쥐고 터뜨려도 별 슬픔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것이었다면 무관계했을지도. 그러나 그렇지 않으니 그것을 도려내려는 시도는 나의 거대한 뿌리를 도려내려는 시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피아노를 치는 기분으로 키보드에 앞에 앉아있다. 나는 코드를 모르고 코드 진행을 음계를 스케일을 다 까먹었으니 남은 것은 고루한 손과 사유뿐이다. 사유라기엔 부끄러운 허덕임 뿐이다.
들이쉬고 내쉰다. 호흡참기 - 템포의 늦춤, 기분, 의식, 자아, 나아감, 성, 달성.
상징계적 욕망, 언어화될 수 없는 감정, 실재의 공포.
쏟아지는 것을 타고 낙하하기를 바란다. 그게 무엇이든 올라탈 수만 있다면 마음 편히 곤두박질 칠 수 있을 것이다. 공기저항만으론 몸이 불안정하여 이리저리 뒤틀리니까. 혹은 밑에서 날아오르는 무언가에 부딪혀 혼수 상태에 빠질 수 도 있다. 안존할 추락을 주세요. 충분하지 않을 것임을 알지 않는가. 그럼에도 바닥을 기어가는 기분과 함께라면 그런 말을 할 수 밖에 없음을 잘 알고 있다.
다시, 들이쉬고 내쉰다. 팔 다리는 편안한 자세로. 다리를 꼬는 것이 골반을 뒤틀리게 한다느니 하는 사실들은 아무래도 좋다. 이완되어 풀어내길 바란다. 들어찬 모든 것들을. 댐이 드러누우며 물들이 빠져나가듯 이곳에 얽힌 대부분의 것들이 편안히 흐트러지길 바란다. 뜨거운 물에 제품 녹차가루가 녹듯이.
그러고 나면 차분하고 가득찬 기분으로 스윙 리듬을 탈 수 있을 것이다. 감정에 압도되어 리듬으로부터 탈선하는 일은 없게 될 것이다. 그저 이곳에 앉아서 투포를 맞추며, 가만히 숨을 쉬고, 들어찬 듯하면 다 내쉬는 것에 오롯이 집중하고, 그러한 것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완연히 존재할 수 있겠지. 그러길 바란다.
when i fall in love;
누워 가만히 정신분석가에게 나날을 고하는 느낌으로. 사랑의 실재적 성질을 인간은 영원히 극복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랑에 빠졌다고 말하면서도 사랑이 무엇인지 명확히 정의할 수 없는 것이 태반이다. 정의에 성공하더라도 그것이 삽시일반 변하기에 정의의 시도는 늘 실패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을 마주할 때의 감정은 늘 변한다. 인간에 대한 인식은 각자의 주관 안에서 일어나기에, 사랑에 빠진 두 쌍 세 쌍 혹은 백 아홉쌍을 마주하더라도 우리는 둘의 사랑에 대한 의식이 다름을 확인할 수 있다. 의식의 동일화가 일어나 말은 같게 할 수 있을지언정, 인식은 여전히 다를 것이다.
나르시시즘은 현대와 포스트모더니즘을 상징하는 질병이 된 듯 하다. 소통은 이제 양방향이 아닌 쌍방의 일방적 말하기이다. 어쩌면 이것이 감정적 진화의 최종점인지도 모른다. 똑똑할 수록, 현명할 수록 타자 대신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유리하다. 타자의 인식계는 무슨 수를 써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타자의 시선을 써보더라도 여전히 절대적 이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첫째로 완전한 인간 이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고, 둘째로 인간의 타자 인식은 스스로의 인식계를 매개하여 발생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글로 타자를 납득시켜야한다는 것은 고되고 아이러니한 작업이 아닐 수 없다. '소통'의 의미가 퇴색되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글은 여전히 타자의 인식계에 자신의 인식계를 납득시키는 도구로 기능해야만 한다. 시대에 역행하고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