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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라이 Mar 22. 2020

당신에게는 '슈가맨'이 필요합니다

'익숙함'과 '새로움' 그 중간의 어느 지점

우리가 옛날 노래를 들으며 행복해하기도 하고 추억에 젖는 이유. 그것은 그 노래가 우리의 전성기를 떠올리게 해 주기 때문이다. 노래는 그냥 노래가 아니다. 유재하의 노래는 곧 우리의 10대 후반을 대변하고 서태지는 20대 대학생 시절을 상징한다.


주말에 가끔 가족들과 JTBC 음악 프로그램 '슈가맨'을 본다. 딱 한 노래로 히트하고 대중의 관심에서 사라진 가수를 다시 찾는다는 취지의 프로그램이다. 주로 80년대, 90년대 가수와 노래가 나오기 때문에 반갑기도 하고 그때의 추억에 젖을 수 있어 남편도 굉장히 좋아한다.


그런데 딸은 그 프로그램이 재미가 없는 모양이다. 주로 식사 시간에 보는데, 밥을 먹는 동안에는 같이 보다가 식사가 끝나면 자기 방으로 사라져 버린다. 하긴... 흘러간 노래가 뭐가 재미있겠는가? 남편과 나한테는 80년대와 90년대의 차이가 크지만 아이들에게는 다 '까마득한 옛날'일뿐이다.


그래도 둘째는 끝까지 남아 같이 봐준다. 이 아이는 워낙 TV를 좋아하기도 하고 아직 어려서 자기 취향이 딱히 없다. TV가 켜져 있으면 그냥 보는 편이다. 그런데 이제 곧 대학생이 될 나이의 딸은 취향이 분명하다. TV는 거의 보지 않고 유튜브로 듣고 싶은 음악을 듣고 영상을 본다. 트위터에 자기가 그린 그림을 올리고 다른 유저들과 대화를 나눈다. 아이 말로는 트위터가 인스타그램에 비해 조금 더 '병맛'이 강하다고 한다.


딸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안타깝지만 남편은 슈가맨을 참 좋아한다. 80, 90년대는 우리의 전성기가 아닌가. 80년대에는 10대 후반, 90년대에는 20대였던 우리는 당시 문화를 가장 왕성하게 소비하는 주도층이었다.


딸은 조금만 들어도 그것이 90년대 음악이었는지 단번에 알아채는데 그 당시 노래, 특히 댄스 음악에 '궁짜작 궁짜작' 하는 특유의 리듬이 있다고 한다. 똑같은 리듬이 노래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진다는 것이다.

조금 생각해보니 우습다. 왜냐면 딸의 반응은 내가 10대 청소년이었을 때 트로트풍의 노래에 대해 보인 반응과 똑같기 때문이다. 아빠가 가요무대를 틀어놓고 혼자 감상에 젖으시는 모습을 자주 보았지만 왜 그렇게 이상한(?) 표정을 짓고 때로는 눈물을 흘리시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굳이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냥 '또 저러시는구나'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제 부모가 된 우리가 슈가맨을 보면서 탄성도 지르고 감동에 젖어 눈물을 흘릴 때마다 딸은 '또 시작이구나'라는 표정을 지으며 자기 방으로 사라진다. 재미있으면서도 씁쓸하다.


우리가 옛날 노래를 들으며 행복해하기도 하고 추억에 젖는 이유. 그것은 그 노래가 우리의 전성기를 떠올리게 해 주기 때문이다.



노래는 그냥 노래가 아니다. 80년대 유재하의 노래는 곧 우리의 10대 후반을 대변하고 90년대 서태지는 20대 대학생 시절을 상징한다. '마지막 승부' 주제가가 나오면 남편은 목소리가 커지고 표정도 상기된다. 온몸에서 순간적으로 엔돌핀이 분출되는 것 같은 반응을 보인다. 이럴 때면 어김없이 '농구대잔치' 이야기, 만화 '드래곤볼' 이야기로 넘어간다.


'마지막 승부' 주제가는 평소에는 꼭꼭 숨겨진 80년대, 90년대 기억의 저장고를 여는 '자동 버튼' 같다. '따따따따다 따따 따따따' 이 전주만 나오면 우리는 벌써 수십 번도 더 말했을 농구대잔치와 드래곤볼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면 아이들은 '또 저 이야기야?'라는 표정을 지으며 주위에서 사라진다.


실소가 난다. 나의 시어머니는 명절 때마다 했던 이야기를 되풀이한다. 결혼 20년 차이니 벌써 20년째 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해서 들었다. 보통은 본인 자식들이 어릴 때 얼마나 똑똑했고 사랑스러웠는지, 그래서 본인이 얼마나 기쁘고 자랑스러웠는지... 뭐 그런 이야기다.


처음엔 그런가 보다 했다. 몇 년 후에는 '어떻게 매번 처음 해보는 말인 것 같은 표정으로 같은 말을 되풀이할 수 있을까?'라고 신기해했다. 이제는 지겨움을 넘어 그냥 그 자리를 슬그머니 떠난다. 내 딸이 보이는 반응과 똑같은 것이다. 


그런데 이런 '추억의 소환'이 나쁠까?


오래전에 EBS에서 한 다큐멘터리를 봤다. 출연진은 다 70대 노인들이다. 한 집을 빌려서 온통 50, 60년대 분위기로 꾸며놓았다. 그들의 전성기 때 유행했던 소품과 음반을 갖다 놓고 벽에는 당대를 지배했던 가수, 영화배우들의 사진을 붙여 놓았다. TV를 틀면 50, 60년대 프로그램만 나온다. 제작진은 출연자들에게 앞으로 이 집에서 한 달간 살게 될 것이며, 이 집에 들아가는 순간 50, 60년대로 돌아간 것처럼 생활해야 한다고 말한다.


출연자들은 일과를 정해서 각자의 일을 한다. 요리도 하고 청소도 한다. 50, 60년대 옷을 입고 함께 춤도 춘다. 함께 연극 대본을 연습해서 연극도 한다. 물론 연극에서 그들은 20대 청년들이다. 함께 여행도 간다. 여행지를 선정하고 동선과 그곳에서 무엇을 할지를 직접 결정하고 실행한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해하기도 하고 다투기도 했던 출연자들은 조금씩 그 생활에 익숙해진다. 집에서는 자녀들이나 가족들에게 다 의지하고 살았던 그들이지만 이 집에서만큼은 모든 일을 직접 하면서 자신들의 생활을 이끌어나간다.


4주가 지난 후, 그들은 건강검진을 받는다. 놀랍게도 그들의 건강 지표는 한 명도 빠짐없이 크게 개선되어 있었다. 심지어 지표가 10년 이상 젊어진 사람도 있었다. 출연자들은 실험이 끝나고 그 집을 떠나는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그들은 1년에 한 번이라도 다시 모여서 꼭 이번처럼 생활하자고 다짐하면서 그 집을 떠났다.


내가 봐도 그들의 표정은 처음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프로그램 초반에, 그들은 그저 무기력한 노인들에 불과했다. 그런데 한 달을 그 집에서 지내고 난 후, 활기에 넘치는 사람들로 변했다. 무엇이 그들을 그토록 행복하게 만들었을까? 아니, 애초에 그들을 무력하게 만들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4주간의 실험이 진행됐던 그 집에서, 그들은 다시 청년이 되었다. 본인들의 전성기로 돌아갔다. 여성 출연자들은 50년대, 60년대에 유행했던 옷들을 입었고 그 당시 유행했던 화장법으로 화장을 했다.


남성들도 마찬가지였다. 집 안팎을 청소하고 생활에 관련된 중요한 일을 직접 결정하고 실행했다.

한마디로, 그들은 '자신들이 아직 젊다는' 인식을 가지고 생활을 직접 주도했다. 그 공간에서는 그들은 '젊은' 것으로 약속돼 있었다. 자신들의 전성기였던 환경으로 돌아가면서 마음이 젊어졌다. 그리고 그 마음은 젊어진 몸으로 나타났다.


젊다고 믿고 젊게 살면 진짜 젊어진다. 그런데 미치지 않고서야 혼자 그렇게 착각할 수는 없다. 자신이 '한창'이라고 믿을 근거가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50, 60년대로 돌아간 환경은 그들에게 그 믿음, 또는 착각을 제공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예전 노래를 듣고 예전 프로그램을 보는 것은 전혀 나쁘지 않다. 오히려 청년기의 기억을 되살리고 그 당시의 느낌으로 돌아가게 해 준다. '예전에 나는 그런 생각을 했었지. 그래, 나에게는 그런 꿈이 있었지' 이런 기억을 떠올리게 해 준다. 그리고 이 기억의 소환은 현재의 삶에 도움을 줄 수 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주변 상황과 적절하게 균형을 맞춰야 할 것 같다. 맨날 옛날 노래만 듣고 있으면 아이들은 질색할 것이다. 나의 전성기를 되돌아보는 지금 이 시간은 내 아이들, 앞으로 주류 문화를 이끌어갈 청년들의 피크 시기이기도 하니까. 그들이 어떤 노래, 어떤 문화를 누리면서 자신들의 황금기를 보내고 있는지 알고 함께 즐기는 일도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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