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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라이 Apr 03. 2020

하나, 어른이 된다는 것의 의미

내 안에 들어와 있는 ‘엄마’라는 존재

모순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것, 그 사이에서 중심을 잡으면서 지지 않는 것


너만할 때 난 외할머니를 미워했단다. 외할머니가 정말 싫고 원망스러웠지. 우리 사이에는 공통점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보였어. 엄마와 딸 사이라는 게 의심스러울 정도로.


(너도 우리 사이에 닮은 점이 별로 없다고 생각하지? ㅎㅎ)


그런데 커서 어른이 되고 보니 난 외할머니를 굉장히 많이 닮은 사람이더라. 엄마의 말과 행동은 어떤 면이든 딸에게 영향을 준단다. 많은 시간이 흐르고 나면, 딸은 엄마의 인생 전체가 자신의 인생 안에 들어와 있음을 알게 되는 것 같아. 미워하든 사랑하든 존재 자체로 연결되어 있다는 걸 말이야.


아마도 같은 시간을 공유하기 때문이 아닐까? 사람은 자기 관점에서, 보고 싶은 것만 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마음이나 입장을 잘 헤아리지 못해.


상대방의 시간과 감정은 묻히고 때로는 영원히 발견되지 않는단다. 그런 의미에서 기억이란 평생에 걸쳐 파헤치는 보물창고이자 판도라의 상자라는 생각이 든다. 


다행히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많은 것을 높은 곳에서, 다각도의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되지. 남의 상황에 처해보면서 비로소 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게 되는 거란다.    


네가 대학생이 되면 꼭 한번 같이 보고 싶은 영화가 있어. 영화 ‘레이디 버드(Lady Bird)’. 당돌하지만 또래의 순수함을 지니고 있는 18세 소녀 크리스틴과 그 가족의 이야기. 아니, 엄마와 외할머니의 이야기, 그리고 너와 나의 이야기란다. 


영화 <레이디 버드>


크리스틴은 살고 있는 새크라멘토의 조용한 마을을 싫어해. 멋지고 화려한 뉴욕의 대학에 진학하고 싶어하지. 부모가 지어준 멀쩡한 이름이 있는데도 ‘레이디 버드’로 불러 달라고 고집하고 엄마 잔소리가 듣기 싫어서 달리는 차 밖으로 뛰어내리기도 하는 맹랑한 소녀란다.  


크리스틴의 엄마는 이런 딸을 이해하지 못해. 그녀는 가족을 돌보지 않은 알코올 중독자 어머니 밑에서 자랐거든. 간호사로 일하며 최선을 다해 아이들을 돌봐 왔는데 딸은 부모가 해주는 모든 것을 하찮고 부끄럽게 생각하니까.


크리스틴은 낡은 차가 부끄러워서 일부러 학교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내리고 작은 집이 창피해서 동네의 크고 좋은 집을 자신의 집이라고 친구들에게 이야기한단다.


물론 크리스틴에게도 할 말은 있어. 엄마는 말로는 사랑한다고 이야기하지만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주지 않거든. 엄마의 이유 있는 추궁에 눈물이 핑 돌면서도 ‘왜 나를 좋아해주지 않느냐’고 엄마에게 대놓고 따져 묻기도 해.


‘사랑한다면 내가 무슨 행동을 하든 다 받아들여줘야 하잖아’ 행동으로, 온 몸으로 항의하지.


하지만 엄마는 학교 별 탈 없이 잘 다니고 부모가 최선을 다해 해주는 것에 감사하는 딸, 집안 사정을 고려해서 지역 대학으로 진학하는 딸을 원하지. 그래서 딸의 행동을 곱게 볼 수만은 없어. 이해를 못하는 건 아니야. 하지만 엄마에게는 엄마로서의 입장이 있는 거니까.

 

영화 <레이디 버드>


마음으로는 이해하지만 한 인간으서의 에고나, 상황 때문에 그렇게 하기가 힘든 거란다. 이게 바로 어른의 삶이지.


모순을 느끼면서도 그것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것, 그 사이에서 중심을 잡으면서 지지 않는 것, 이런 게 어른으로 살아간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어.


이 영화에서 엄마는 18세의 나와 47세의 외할머니를 모두 만났단다. 충분히 친밀하면서도 미묘하게 평행선을 달리는 크리스틴과 엄마. 두 사람을 모두 이해할 수 있었어.


영화는 내 마음 속에 아직도 살아 있는, 반항기 가득한 18세의 나를 소환했지. 그와 동시에 고집스럽게 내 입장에서만 서서 단 한번도 눈길을 주지 않았던 30년 전 외할머니의 마음과 그녀의 삶을 들여다보게 해 주었단다.


한편으로는 17세의 내가, 다른 한편으로는 47세의 내가 함께 이 영화를 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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