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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라이 Apr 03. 2020

둘, 어른이 된다는 것의 의미

특별하지 않은 시간들도 모두 나였음을 알아가는 과정

내 시간 안에 들어와 있는 타인의 시간까지도 볼 수 있다면, 그러면서 특별해 보이지 않는 네 모습을 사랑할 수 있다면 너는 점점 더 어른이 되어 가고 있는 거야.


크리스틴이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집을 떠나는 날, 엄마는 끝내 차에서 내리지 않아.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면서 갑자기 길가에 차를 세우고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울게 되지.


난 그녀의 마음 속 목소리를 들었어.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했는데, 너를 있는 그대로 좋아한다는 말을 해 주지 못했는데, 그렇게 듣고 싶어하는 그 말을 해주지 못했는데’.


그게 모든 에고와 상황과 거짓된 감정을 겹겹이 벗길 때, 가장 밑바닥에 자리잡고 있는 엄마의 마음이거든.   


크리스틴은 대학에 가서 성인으로서의 시간을 보내면서 비로소 자신을 받아들이게 돼. 새크라멘토에서 보낸 시절들이 자신을 키운 시간들이었으며 지워버리고 싶었던 그곳에서의 모습이 진짜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수용하게 되지.


그리고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크리스틴’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 난단다.

 

 영화 <레이디 버드>


가까이에서는 소중함을 느낄 수 없는 것들이 있어. 지나고 나서야, 멀리 떨어져서야 비로소 알아보게 되는 것들. 사랑이라는 것, 행복이라는 것, 추상적이어서 바로 옆에서는 알아차리기 어려운 것일까? 가장 행복한 순간, 가장 소중한 시간들이 바로 내 옆에 있었음을 왜 한참 나중에서야 깨닫게 되는지.


굉장한 일이 일어나야 할 것 같은데 내 인생만 별 볼 일 없는 것 같아서 실망스러웠던 그 시절. 그 질풍노도의 시간이 외할머니의 힘겨운 중년과 중첩된다는 사실을 영화를 보고 다시 한번 느꼈단다. 내가 보낸 시간은 내 시간만이 아니었던 거야. 영화를 보면서 나의 사춘기와 이제 엄마가 되어 맞고 있는 중년기를 함께 바라볼 수 있었단다.


어른이 된다는 건 상황과 사람을 어느 한 측면으로만 바라보지 않는 법을 배워나가는 과정인 것 같아. 


특별하지 않은 시간들도 모두 나였음을 알아가는 과정이라고나 할까? 그 시간을 받아들이고 그런 나를 사랑하게 되는 거지.


영화 <레이디 버드>


네 모습이 불만이라는 거 알아. 굉장한 일이 일어나야 할 것 같은데 내 인생만 별 볼 일 없는 것 같아서 실망스럽기도 하겠지. 엄마도 네 나이 때 그랬어.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게 그저 ‘그리움’이라는 한 단어로 남아 있구나.


이 영화를 보면서 크리스틴과 엄마 사이가 꼭 나랑 외할머니 사이 같다고 느꼈어. 사랑하면서도 서로 자신의 입장에서만 바라보잖아. 크리스틴의 외할머니는 알코올 중독자로 가족을 돌보지 않았고 엄마는 모든 걸 혼자 힘으로 헤쳐나가야 했어. 독립했고 자신의 이름을 걸고 일을 하고 가정도 이루었지.


일하면서, 아이들을 돌보고, 대출금도 갚고, 그냥 어른으로서의 인생을 꾸려나가는 건 정말이지 쉽지 않단다. 매일 최선을 다해 삶을 꾸려가고 있는데, 책임을 다하고 있는데,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사춘기 딸이란 버겁고 얄밉고 가끔은 야속한 존재일 거야.


내가 전적으로 엄마의 입장에서 영화를 보았다고? 아니야. 엄마는 엄마이기 이전에 딸이란다. 마음 속에는 아직 엄마에게 사랑 받고 싶고, 기대고 싶고, 아직도 내 인생의 가장 멋진 날은 오지 않았다고 믿는 소녀가 있단다. 영화를 보는 내내 엄마는 크리스틴이었어. 어디로 튈 지 모르는 불안하고 사랑스런 18세의 레이디 버드.


하지만 가끔씩은 크리스틴의 엄마를 안쓰럽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단다. 30년전 외할머니는 인생에서 가장 큰 늪을 경험하고 있었어. 그런데 난 그저 ‘엄마라는 기능적인 역할’로만 외할머니를 바라봤던 거야. 정말 이기적이었지. 딸의 입장에서, 엄마가 당연해 해 주어야 하지만 해주지 않았던 것들만 생각했거든.

 

영화 <레이디 버드>


외할머니는 그런 것들을 해줄 상황이 아니었어. 물질적으로는 집안 사정 때문에, 정서적으로는 그런 것들을 받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모르고 한 잘못과 실수를 비난하고 미워할 수 있을까? 이제 30년 전의 외할머니 나이가 된 엄마는 그런 외할머니에게 미안하고 외할머니의 삶이 안쓰럽기만 해.


어때. 크리스틴과 엄마 모습에서 우리 모습이 보이는 것 같니?


내 시간 안에 들어와 있는 타인의 시간까지도 볼 수 있다면, 네 안에 들어 있는 엄마의 모습을 볼 수 있다면, 그러면서 특별해 보이지 않는 네 모습을 사랑할 수 있다면 너는 점점 더 어른이 되어 가고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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