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줄라이 Apr 05. 2020

과거로 돌아갈 한번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5살의 너에게 돌아가서 함께 모래놀이를 하고 비를 맞고 싶어'

죽기 직전에 과거의 한 순간으로 돌아간다면, 어떤 기억을 고르겠습니까?


어릴 때 네가 얼마나 사랑스러운 아이였는지, 엄마를 얼마나 행복하게 해 주었는지 이야기하면, 넌 부끄러워하며 듣기 싫어했지. 그 시절을 생각하면 난 늘 행복한 기분에 젖어 드는 데 네가 싫어해서 조금은 서운했어.


나중에 알고 보니 넌 단지 부끄러워서 그런 건 아니었어. 마치 ‘그때는 그렇게 천사처럼 착했고 예뻤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다’는 말로 들려서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나 봐. 절대로 그런 의미는 아니었는데.


너의 3살, 5살 모습은 엄마에게는 평생 남아 있을 기억이야. 이건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엄마의 1호 보물이란다. 너에게 ‘자아’라는 게 생기기 전 엄마를 맹목적으로 좋아해주던 너. 


그때 네가 보내주는 그 전폭적인 신뢰와 애정 덕분에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가 된 것 같았어. 모든 엄마는 아이가 어리던 그때의 기억을 다이아몬드처럼 평생 마음 속에 간직하고 살아간단다.


네가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색해할 때마다 생각나는 영화가 하나 있어. ‘어바웃 타임(About Time, 2013).’


팀의 집안에는 남자들에게만 대대로 전해지는 놀라운 능력이 하나 있어. 그건 바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힘이야. 팀은 런던에서 우연히 만난 메리라는 여자에게 첫눈에 반하고 그녀의 사랑을 얻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게 되지. 어색한 말이 튀어나오면 시간을 되돌려 상황을 멋지게 마무리하고 좋았던 순간은 여러 번 리플레이해서 그들의 사랑을 더욱 완벽하게 만들지.  


영화 <어바웃 타임>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니 정말 너무 멋지지 않니? 그런데 메리와 결혼해서 아이들을 낳고 행복하게 살아가던 팀의 일상에 일련의 사건들이 벌어지게 돼. 팀의 아버지가 어느 날 암 선고를 받고 죽음을 기다리게 된 거야.


얘기했지?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은 팀 집안의 남자들에게만 대대로 전해오는 능력이라고. 아버지가 원하기만 한다면 과거로 돌아가서 얼마든지 더 살 수 있을 거야. 그런데 아버지는 그렇게 하지 않아. 아버지는 딱 한 순간을 선택하는데 그건 팀이 어릴 때로 돌아가 손을 잡고 함께 바닷가를 산책하는 순간이었단다.


영화 <어바웃 타임>


이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팀의 아버지의 마음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어. 그런 능력이 있다면 되돌아갈 과거의 좋은 시간들이 더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하지만 지금은 그 마음을 충분 이해한단다.


부모에게 가장 소중한 보물은 아이들이 어릴 때, 순수한 신뢰와 애정의 눈빛으로 부모를 봐 주던 바로 그 시간들이야. 


한가지 안타까운 건, 아이들이 가장 빛나는 그 시기가 부모의 인생에서는 가장 바쁜 시간이라는 거야. 돌이켜보면 엄마도 30대가 가장 바빴단다. 10년이라는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를 정도로, 정말 눈 깜박할 새에 흘러가버린 것 같아. 하루 하루는 참 길었는데, 참 이상하지?


아마 연애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일하고, 인생에서 가장 큰 사건들이 줄줄이 일어나고 그 일들을 수습하느라 종종거리며 뛰어다니던 때여서 그런 게 아닌가 싶다. 그 때는 아이들의 가장 사랑스러운 모습을 충실히 음미할 시간과 여유가 별로 없단다. 하루 종일 일하고 아이들 뒷치닥거리하고 의무를 다하다 보면 기진맥진해지던 시간들이니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회로를 돌려봐도, 그 시절은 엄마, 아빠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어. 엄마, 아빠는 아직 젊고, 너는 어리고, 많은 가능성이 여전히 반짝반짝 살아 있었을 때였지. 다시 돌아가더라도 더 행복할 수는 없을 거야. 하지만 그 시간은 이제 지나가버렸지. 생활에 쫓겨 그 아름다움을 충분하게 음미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남긴 채.


그러니까 네가 가장 예쁘고 빛나는 모습이었던 그 시절은 엄마의 기억 속, 마음 속 앨범에 ‘최애’ 사진으로 남아 있는 거야.



팀의 아버지도 마찬가지였겠지. 그래서 그는 그 많은 과거의 순간들 중에서 바로 그 순간, 아들의 손을 잡고 바닷가를 걷던 그 기억을 고른 거란다. 그것이 그의 가슴 속에서 영원히 리플레이되고 있던, 올려도 올려도 마르지 않았던 행복의 원천이었거든.


이제 같은 질문을 엄마한테 해 보자.


‘죽기 직전에 과거의 한 순간으로 돌아간다면, 어떤 기억을 고르겠습니까?’


네가 5살이었을 때였을 거야. 유난히 더웠던 그 해 여름, 너랑 나는 매일 놀이터 모래사장에서 함께 모래놀이를 했었지. 그러던 어느 날 밤. 장비가 쏟아지자 너는 밖에 나가 비를 구경하고 싶어했어. 저녁 8시가 넘었지만 너의 그 간절한 눈빛에 져서 우산을 쓰고 밖에 나갔단다. 손바닥 위에 떨어지는 빗줄기를 느낀 너는 신이 났지. 말릴 틈도 없었어. 처음에는 우산, 나중엔 장화까지 벗어 던지고 비 웅덩이에 첨벙 뛰어들었어.


엄마가 어떻게 했을 것 같니? 엄마도 너랑 똑같이 했지. 신발 벗고 물웅덩이에 풍덩! 영원처럼 느껴진 그 짧은 시간 동안 우리는 모든 것을 잊고 하나가 되어 비를 만끽했단다.


‘죽기 직전에 과거의 한 순간으로 돌아간다면, 어떤 기억을 고르겠습니까?’


엄마는 네가 5살 여름. 지금으로부터 13년전, 더웠던 어느 여름 날을 고를 거란다.


“5살의 너에게 돌아가서 함께 모래놀이를 하고 비를 맞으며 물웅덩이에서 놀고 싶어.”


매거진의 이전글 둘, 어른이 된다는 것의 의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