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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린 일기 Nov 20. 2020

(#079) 2018. 9. 27.

Hontanas 31.9km

공립 알베르게는 시간을 아주 엄격히 관리했다. 소등과 문단속부터 아침에 문을 열어준 것까지 시간을 지킨다. 안전 관리때문이라고 이해했지만 꼭두새벽부터 출발하는 사람들에게는 다소 불편한 듯 했다.

짐을 챙겨 내려와 요전 날 나무에서 딴 무화과를 요플레에 섞어 먹고 있다가 요한나 일행을 만났다. 인연이라는 게 참 신묘해 다시 만난 김에 함께 걷게 되었다. 남아공에서 온 릭, 캐나다에서 온 스테파니, 스페인 알베르토, 헝가리 디아나, 한국인 한 분도 함께였다. 꼭 일찍 출발해야겠다는 순례자 소동으로 느지막이 관리자가 내려와 우리는 다 함께  출발할 수 있었다. 대도시일수록 노란 화살표는 눈에 잘 안 띄어서 길을 찾기 위해 조금 헤맸다.

자그마한 교회만큼 아담한 할머니 성도 한 분이 실 목걸이를 건네며 축복기도를 해주셨던 곳. 알아들을 수 없음에도 그의 진심이 전해져 뭉클했다. (c)밀린 일기



부르고스에 도착하기 위해 거리와 속도를 조절하며 걸었더니 온타나스까지 가는 길은 거의 고행이나 다름없었다. 자그마치 30 킬로미터. 지금이 육체의 구간인지 영혼의 구간인지 광활한 사막 위에서 할 말을 잃었다. 나 자신과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구간이라니, 새빨간 거짓말이다. 머릿속에는 그저 시원한 그늘과 레몬 맥주가 간절했다. 9월이 저물어가는데도 지칠 줄 모르고 내리쬐는 한낮의 뙤약볕은 꼭 사막을 연상케 했다. 길가에 마른 짚단을 쌓아둔 곳에서 다른 순례자들이 띄엄띄엄 쉬고 있었다.

저 멀리 외톨이 나무말곤 죄 마른 풀밭 일색이었던 메세타. 스페인 고지대에 있는 일종의 사막이다. 고행자처럼 달군 돌길에 발걸음을 떼야하는 마의 구간이다. (c)밀린 일기



가는 길목에 작은 교회가 있어 또 한 번 들렀다. 문이 열린 곳에서는 쎄요를 받을 수도 있으니 뭐든 모으고 성취하는 재미에 열을 올린 사람들이 빼놓지 않고 들리는 곳이다. 의자에 앉아 잠시 마음을 정돈하고 내부를 둘러보며 해를 가린 천장에 감사했다. 너른 창에 빛이 쏟아져도 석조 건물 특유의 서느런 내부는 무척 시원했다.

언제나 피 흘리며 고통스럽게 매달려 있는 그와 늘 슬픔에 잠긴듯한 마리아. 언젠가 미시와 보는 이마저 고통스럽게 하는 제단의 모습이 다소 무섭다는 얘기를 했었다. (c)밀린 일기



높고 메마른 평야는 아니러니 하게도 사람들과의 연결을 진하게 일깨운다. 점점이 움직이는 사람들이 저 멀리까지 내다보였다. 각자 고독한 시간에 쫓겨 걸음을 옮기는 듯 보여도 뒤따르는 사람들은 그 연결 위에 실리는 기분으로 힘을 낸다. 문맥 그대로 Out of nowhere 인 공간 속 낯 모르는 사람들이 현실을 직시하게 한다. 우리가 함께 걷고 있다.

가장 앞서는 또 가장 뒤늦은 사람은 얼마쯤 떨어져 있으려나. 길고도 고통스러운 길 위에 곁을 스치고 이끌어 주는 사람들에게 위로 받으며 또 한 번 힘을 냈다. (c)밀린 일기



마침내 도착한 온타나스는 땅이 푹 꺼져 만들어진 마을 같았다. 메세타 평원이 비로소 끝나는지 마을은 가파른 모래길을 한참이나 내려가야 만날 수 있었다. 오아시스라도 만난 듯 반가움에 날듯이 걸었다. 입구를 지나 적당한 알베르게를 찾자 뿔뿔이 흩어졌던 일행은 약속이나 한 듯 한 곳에서 만났다.

한낮의 열기는 걸을 때에는 힘들어도 빨래를 말릴 때에는 한 줌도 놓칠 수 없어 샤워하고 부랴부랴 오늘 입은 옷을 빨래해 널었다. 1층 펍에서 간단히 맥주를 마시며 오는 손님들을 반겨 인사했다.

제이콥의 조개를 새겨넣은 이정표 위에는 갖가지 염원이 쌓인다. 누군가가 잊었거나 기부한 물건부터 음식, 돌멩이까지. 지도 한 장 없이 걸어도 괜찮은 이유! (c)밀린 일기



함께 저녁을 먹으면서 각자 색다른 요리에 도전해보았다. 매일 튀기거나 볶은 고기를 먹은 나는 콩 요리를 주문했다. 낮에 함께 맥주를 마신 나타샤와 이탈리아 막달레나(우리가 지어준 애칭이었다) 함께였다. 식사를 기다리며 엉망진창 우노를 했다. 까미노에서는 가벼운 카드놀이가 진짜 유용하다. 친구 사귀기도 좋고 시간 때우기에도 안성맞춤이다. 식탁에는 러시아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영어, 독일어, 한국어가 붕붕 떠다녔다. 각자 할 줄 아는 언어로 조금씩 대화했고 하이라이트는 이탈리아 제스처로 Mamma mia! 를 외칠 때였다. 힘든 구간을 걸은 여파로 밤새 코골이에 시달렸지만 평생 와볼 것 같지 않은 신비로운 공간에 둘러 쌓인 낯선 사람들, 떠들썩한 식탁이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성 안톤 스프. 정체는 병아리콩과 고기 약간을 넣은 스프였다. 병아리콩은 많이 먹으면 방귀가 잦단다. 우리는 방구쟁이 스프라고 부르며 깔깔댔다. (c)밀린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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