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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린 일기 Nov 21. 2020

(#080) 2018. 9. 28.

Boadilla del Camino 28.5km

메세타에서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어제 겪은 한낮의 열기가 두려워 오늘은 새벽부터 서둘러 출발하게 되었다. 밤새 거리에 내려앉은 먼지가 아침을 깨우는 발걸음에 공중으로 떠올랐다.

중간 거점인 카스트로 헤리츠를 지나는 도중에 옛 교회 터가 남아있다. 아직 온전한 작은 방은 순례자들에게 무료로 개방되어 있다. 물과 전기가 없어 지내기에는 조금 불편해 보였지만 함께 걷던 이들은 오히려 낭만적이라며 여기서 머문 이들을 부러워했다. 그렇지만 치안이 조금 불안한 곳이었다.

이른 아침 달빛이 태양처럼 밝다. 지붕과 외벽이 허물어진 건물은 하나 남은 종과 창살이 여기가 교회였다는 것을 말해줬다. (c)밀린 일기



유니콘 스카이가 지나고 달빛이 엷어지자 아침노을이 졌다. 해가 우리 등 뒤에서 뜨는지 마주한 건물들이 붉게 빛난다. 일행으로 출발한 우리는 어느덧 각자의 속도로 걸으며 흩어졌다. 카스트로 헤리츠 교회에 들러 쎄요를 받고 커피 브레이크를 가지다 나타샤를 만났다. 우리 중 나이가 많은 축에 속했는데도 벌써 도착해 카페에서 쉬고 계셨다. 일교차가 점점 벌어져 아침에는 따뜻한 커피 한 잔이 간절했기에 그렇게 함께 앉아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눴다.

아침 노을에 붉게 물든 교회와 건물들이 멀리서부터 보인다. 옛 모습이 그대로 느껴지는 작은 마을이었다. (c)밀린 일기



내륙 마을은 아무래도 작은 곳들이 대부분이다. 오늘 머문 엔 엘 알베르게는 그런 마을에서 가장 큰 숙소였다. 그 덕에  앞서 나가 헤어졌던 이들을 하나 둘 다시 만나며 안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방은 여유가 있어 오늘은 원하는 침대를 고를 수 있었다. 까미노가 순위 경쟁은 아니라지만 선착순이 가장 공평한 규칙이었으므로, 보통 늦게 도착하는 나에겐 무척 좋은 소식이었다. 흩어졌다 다시 모인 우리들은 야외 테이블에 앉아 늦은 오후 햇살을 즐기며 맥주잔을 부딪혔다. 매일 음주가 습관이 된 것인지 아니면 물 대신 마셔서인지 절대 극복할 수 없는 유혹이다.

순례자에게 가장 중요한 장비는 단연 신발이다. 빨래와 샤워 후 바람 잘 드는 곳에 신발을 늘 말려둔다. 이집 고양이가 창문 안쪽 순례자들이 궁금한가보다. (c)밀린 일기


마을에는 갈만한 식당이 없어 그냥 알베르게에서 저녁까지 한꺼번에 먹었다. 식당에서 모든 순례자들과 둘러앉아 먹는 식이었다. 오늘 처음 만난 사람과 순례자 공통 질문을 하고 대화를 이어나간다. 미국에서 태어나 지금은 런던에 산다는 아주머니 한 분은 작년에 딸이 까미노를 걷고 강력 추천으로 왔다고 한다. 힘들어도 딸의 자취를 뒤따르며 무척 즐거운 시간을 보내시는 듯했다. 간간히 만났던 프랑스인 네 분과도 다시 만났다. 인상이 선해 늘 인사를 주고받았던 할아버지 한 분의 사연이 놀라웠다. 알고 보니 아내와 사별 후 프랑스 집에서부터 내내 걸어오셨다고 한다. 가슴에 고인 슬픔을 이렇게 걸으며 흘려내는 중이신 것 같았다. 까미노를 찾는 이들 모두 저마다의 사연 속 크고 작은 아픔이 많았으므로 우리는 조용히 위로하며 응원의 포도주를 건넸다.

지나던 담벼락에 씌여있던 글. 순례자의 여정은 첫 발을 떼는 것에서 시작해 마음과 영혼이 맞닿은 곳에서 끝난다는 구절이 머릿속에 남아 마음을 울렸다. (c)밀린 일기
매거진의 이전글 (#079) 2018. 9.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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