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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린 일기 Nov 22. 2020

(#081) 2018. 9. 29.

Carrion de los Condes 24.9km

홀로 걷다 동행이 늘어나면 당연한 이치로 그만큼 장단점도 늘어난다. 새로운 이야기를 들으며 영감을 얻지만 우리가 처음부터 동행이 아니었기 때문에 어디까지 챙겨야 하는가를 논하면 조금 곤란해진다. 서로의 필요와 정에 따라 함께 다니지만 우리는 결국 각자 무언가를 찾아왔고, 때문에 의사소통과 일정관리 등은 기본적으로 할 수 있어야 서로에게 짐이 되지 않는다. 나도 모르게 편리하게 기대진 않았는지 익숙함에 속아 긴장을 놓치진 않았는지 한 번쯤 돌아보게 된다. 심신이 고단하면 짜증도 늘어서 작은 균열에도 금방 지쳤다.

도중에 들린 카페. 주인도 몇년 전 까미노를 찾았다 반해서 다시 돌아왔다고 한다. 그늘이 주는 안온함에 취해 잠시 쉬었다. 주변에는 작은 동물들이 돌아다녔다. (c)밀린 일기



오늘은 괜히 더 힘든 날이었다. 까미노 데 프랑세즈는 주요 구간을 기준으로 크고 작은 샛길들을 이용할 수 있다. 우리는 주로 정식 구간을 걸었는데, 샛길을 빠져나온 타카를 만나 마지막 구간을 함께 걸었다. 타카는 첫날 만났기 때문에 까미노에서 본 친구 중 가장 오래된 친구였다. 그 덕에 뻔한 질문은 생략하고 더 깊은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을 만큼 영어가 능숙하지 않아서 아쉬움이 남았지만, 그도 해외봉사 경험이 있다는 것, 주민들과 사귀며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 등. 비슷한 점을 찾아 편하게 대화할 수 있었다.

볕에 지쳐 헐떡이는 중 때마침 오늘의 도착지 표지판이 보였다. 까리온, 우리는 영어로는 Carry on이라며 좀 더 힘을 내자고 서로를 다독였다. (c)밀린 일기



까리온의 공립 알베르게는 수녀님들이 운영하셨다. 도착한 순서에 맞춰 줄을 서있으면 각자 방명록을 작성하고 작은 기념품을 받아 배정받은 방에 올라갔다. 이때 받은 장바구니가 아주 유용했다. 수녀님들은 공동 규칙들을 일러주시곤 새로운 순례자들을 맞으러 내려가셨다. 오늘도 편안한 일층 침대에서 머무를 수 있게 되어 행운이었다.

빨래와 세탁 후 요기를 하러 나갔다. 알베르토 친구다 근처에 왔다는데 같이 밥을 먹기로 했기 때문이다. 모처럼 다 함께 둘러앉아서 이 기회에 단체 사진도 찍었다. 찍힌 사진을 보니 다들 얼굴이 까맣게 타고 살이 내려 안쓰러운 모습이 다소 우스꽝스러웠다. 저녁은 다 같이 만들어 먹기로 해서 요한나와 장을 보러 갔다. 까리온은 제법 큰 동네여서 큰 마트가 두 개 넘게 있었지만 주말에는 문을 닫는다고 하여 서둘렀다. 그러나 이미 물건은 많이 남아 있지 않았다. 저녁 식사는 얼떨결에 초대된 것이기에 사람 수를 가늠할 수 없어 별 수 없이 함께 먹을 디저트만 준비하기로 했다.

까리온 교회에서 무료 음악 공연이 열렸다. 좌석을 채운 이들은 대부분 순례자들이었고 높은 천고에 음악 소리가 멀리까지 퍼져나갔다. (c)밀린 일기



알베르게에는 커다란 공터가 있어 순례자들이 삼삼오오 무리 지어 떠들고 있었다. 까미노에 온 지 보름쯤 되자 대부분 한 번쯤은 얼굴을 본 사람들이었다. 공연을 함께 봤던 리투아니아의 얼굴이 무척 아름다운 친구, 군인이었던 태국계 프랑스인, 큰 은혜를 입었던 한국인 한 분도 함께 였다. 그리고 항상 우쿨렐레를 지고 다니는 일본인 친구가 작은 연주회를 하고 있었다. 연주할 수 있는 곡이 많이 없어 주변 친구들은 somewhere over the rainbow만 매번 연주한다고 놀려댔지만 여력만 있다면 악기를 가지고 다니는 것도 좋은 생각인 것 같았다.


공동 주방을 함께 사용하다 보니 차례를 기다려야 했다. 오늘 식사를 준비하는 친구는 이탈리아에서 미술랭 별을 받았던 셰프 클라우디스였다. 나는 여전히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라는 생각에 조금 주눅 들었는데, 수지가 너무 걱정 말라며 잘 말해줬다. 그러고 보니 수다쟁이 페데리코도 여기서 처음 만났던 것 같다. 소등 시간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요리 후 실내로 옮겨 함께 식사했다. 또 한 번. 인생에 다시없을 순간을 느껴본다. 모두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내국인조차 알지 못하는 어떤 마을에 모여 이탈리아인 셰프의 대접을 받는다니. 우리는 잔을 부딪히며 너무나 신기한 우연이라고 즐겁게 외쳤다. 신나게 먹고 요한나와 준비한 Flan을 나눴다. 토핑으론 길에서 주운 아몬드를 올렸고 감쪽같이 장식하자 사람들이 직접 만들었냐며 깜짝 놀랐다. 아몬드만 까서 올렸다고 너스레를 떨자 준비할 시간도 부족한데 손도 빠르다며 다들 칭찬해줬다.


괴로움을 씻어내려 찾은 까미노. 걸으면서 쓸려 내려 간 슬픔 때문에 생긴 공허에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가득 차 너무나 행복했다. 또 한 번 영원히 시간이 멈추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밤이 흐른다.

조개 토마토 스튜와 생선구이가 메인 요리였다. 사람이 많은 덕에 음식은 살짝 부족했지만 식탁은 만족스런 행복으로 가득찼다. (c)밀린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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