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밀린 일기 Nov 23. 2020

(#082) 2018. 9. 30.

Ledigos 23.2km

이른 아침 수녀님들의 알베르게를 떠났다. 알베르게 이름인 Espiritu Santo는 알고 보니 Holy Sprit이라는 뜻이었다. 나중에 성당에서 미사를 드릴 때 자주 듣게 되었다. 해도 안 뜬 새벽을 다시금 가른다.

어제 점심에 낮 맥주와 사람들에 취해 왁자지껄 떠들다가 그만 안경을 잃어버렸다. 세상에 이렇게 멍청할 수가. 아주 어렸을 때 가족들이랑 바닷가로 놀러 갔다가 텐트 위에 안경을 올려두고 잃어버린 적이 있다. 그때 엄마가 너는 하다 하다 눈을 놓고 다니냐며 타박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다 자라 머나먼 타국에서 안경을 잃어버리다니! 세상 끝까지 반도 넘게 남았는데 눈앞에 깜깜했다. 눈이 나빠 야맹증도 있는데 큰 일이었다. 선글라스가 도수가 없어서 낮동안 번갈아 꼈더니 이런 일도 생긴다. 안경을 잃어버렸다는 것도 너무 늦게 알아서 시간이 지난 후 머물렀던 장소를 더듬어 보며 애타게 안경을 찾았지만 말짱 허사였다. 지난밤 속상함에 여기저기 하소연을 했는데 그제 만난 한국 분이 시력이 비슷하다며 렌즈 한통을 선물했다. 어려움에 빠지면 언제나 도움의 손길이 다가오는 기적의 까미노. 의대생이라던 그분은 또 다른 의미로 사람 하나를 살렸다.

이른 아침 길을 나서며 지난 밤 사람들로 떠들썩했던 알베르게 앞마당. 이른 아침인지 한밤 중인지 구분되지 않는다. 계절이 바뀌고 있다. (c)밀린 일기



레디고스로 가는 길에는 아름다운 글귀가 가득이었다. 얼마만큼 이었냐면, 알베르게에 도착해 만난 순례자들과 너 그거 봤어? 이건 봤어? 하며 서로가 포착한 순간에 대해 대화를 할 정도였다. 걷는 게 충분히 익숙해지자 지친 발걸음 소리는 타박타박하는 거친 소리가 났다. 그맘때 만난 발바닥 키스는 마치 어떤 향기에 익숙해진 코끝을 자극하는 새로운 향 같았다. 우리가 어떻게 걷고 있었더라? 하고 반추하며 다시 즐겁게 걸어본다.

발바닥으로 대지에 입맞추듯 걸어봐! 이 문구가 제일 인기 있었다. 우리는 입으로 쪽쪽 소리를 내며 이 앞으로 한참 걸어갔다. 발바닥 키스라니 너무 귀엽지 않은가 (c)밀린 일기



마지막 구간에 우리는 아는 사운드트랙을 크게 틀어놓고 노래를 불렀다. Fun의 We are young, Carry on, Mika의 Happy ending, Yann tiersen과 영화 Untouchable에 나온 노래가 허공을 채운다. 노래덕에 마지막 스퍼트를 올리며 레디고스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몇 군데 후보가 있었지만 개중에 정원이 예쁜 곳을 골랐다. 먼저 도착한 사람들은 천국같은  정원에서 쉬고 있었고 우리는 먼저샤워와 빨래를 했다. 옥상에 자리가 없어 바가지를 빌려다 요령껏 널으려는데 센 바람이 불어와 빨래가 자꾸만 날아다녔다. 떨어진 빨래를 다시 주워다 너는 와중에도 갑자기 웃음이 나와 요한나와 한바탕 웃었다.

조금이라도 늦었으면 알베르게에 자리가 없을 뻔했다. 느림보 순례자들은 방 사이를 잇는 응접실에 매트리스를 깔고 밤을 보낼 것이다. 안도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오늘은 행복한 간식타임을 즐겼다. 페데리코인가 디아나, 아니면 수지였던가. 아무튼 누군가가 가장 좋아하는 공룡 크래커, 초콜릿에 진심인 내가 고른 우유 그리고 요한나의 초콜릿 아이스크림. 당 떨어진 몸에 순식간에 에너지가 충전됐다.

간식을 먹으러 나온 야외 테이블에서 만난 메릴린은 핀란드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자라 영어 선생님이었다. 어쩐지 매끄럽고 분명한 영어 발음이 아주 끝내줬다. Posh English를 잠시 배울 수 있었다. 만나는 사람이 다양해지면 알아가는 것도 많은 까미노다.

이후에도 상점에 들릴때마다 친구에게 줄 공룡 크래커를 찾아다녔다. 나중에 알고보니 다들 같은 생각으로 과자를 사러 다녔고 문득 마음이 따뜻해졌다. (c)밀린 일기



매거진의 이전글 (#081) 2018. 9. 29.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