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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린 일기 Nov 24. 2020

(#083) 2018. 10. 1.

Calzadilla de Los Hermanillos 30.3km

오늘은 프랑스 길에서 내려와 사아군 쯤에서 옛 로마 길을 걷기로 했다. 페데리코, 릭, 요한나, 수지, 디아나, H, 나. 어느새 일행이 이렇게 불어나 있었다. 일단 같이 출발하더라도 중간에 띄엄띄엄 걸으며 모였다 흩어졌다를 반복한다. 걸음이 맞으면 이 사람과 얘기했다 자연스럽게 멀어지고 가까워지길 반복한다. 거리가 멀어지면 때때로 조바심이 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 길 위에 친구들이 함께 걷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지치더라도 다시 힘을 낼 수 있다.

이른 새벽이 어슴푸레하게 밝아온다. 서쪽으로 갈수록 날은 조금씩 추워져 가벼이 챙긴 짐에 따뜻한 옷이 필요해진다. (c)밀린 일기



새벽을 깨우는 커피가 간절해질 때쯤 우리는 재밌는 간판을 발견했다. 마을에서 마을로 이동하는 도중에는 커피 트럭이나 카페 간판이, 마을 즈음에 도착하면 알베르게를 소개하는 간판이 많다. 카페 광고를 보고 커피 생각에 마음이 벌써 흐뭇하다. 2~30 킬로미터씩 걷다 보면 1 킬로미터는 애교스러울 지경이다. 거의 매일 아침마다 카페 콘 레체를 마시곤 했는데 지금처럼 바람이 차가워지면 그때 마신 커피가 생각난다. 이른 아침 눈 뜨자마자 걷고 해가 떠오를 때쯤 마시는 모닝커피 맛은 아마 평생 가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다시 출발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H가 순례자 여권을 잃어버렸다. 순례자 여권은 중간중간 쎄요를 받아야 산티아고에서 증명서를 받을 수 있는데 순례자에게는 신분증이나 다름없어 분실하면 큰 일이었다. 별 수 없이 H는 왔던 길을 되짚어갔고 우리는 머물렀던 장소를 곱씹으며 카페에 전화를 걸어보기도 했다. 사연인 즉 짐을 챙기다 카페 앞에서 떨어뜨린 모양이었다. 잃어버린 사실을 너무 늦지 않게 깨달아 다행이었다. 우리 모두 아찔한 기억이다.

첫 번째 카페를 아쉽게 지나치고 이 유쾌한 광고를 발견했을 때는 참을 수 없었다. 내부는 따스했고, 선객에게 추천받은 샌드위치도 무척 맛있었다. (c)밀린 일기



로마 시대에 지어진 석탑, 수백 년 전 지어진 순례자들을 위한 호스피스로 향하는 Our Lady of the Bridge. 사아군은 여러 교회를 비롯한 로마네스크풍 Mudéjar 양식의 건물이 남아 있는 역사적인 도시였다. 작은 규모에 구경거리도 알찬 멋진 곳이다. 그런데 먼지 밭 길을 걷다가 잘 닦인 보도를 걸으니 딱딱한 느낌이 약간 어색하다.

문명의 공간으로 돌아온 우리는 제일 먼저 약국으로 향했다. 건조하고 쌀쌀해진 날씨에 입술이 자꾸 부르터서 립밤, 떨어지면 항상 사두곤 하는 물집 방지 패드(까미노 내내 이 패드를 찬양했다), 누군가는 세면용품을 샀다. 그리곤 광장에 모여 앉아 제일 근사한 노천카페에서 간단히 끼니를 때웠다. 부르고스에서 먹은 추로스가 너무 맛있어서 스페인식 핫초코와 주문해 친구들과 나눴다. 카페마다 추로스를 판매하느냐고 묻고 들어갈 정도였다. 유난이었지만 여행의 묘미는 언제나 마을 별로 다양한 음식을 맛보는 것이었기 때문에 끝내 모두 만족한 시간이었다.

시계방향으로 Our Lady of Bridge, 석탑, 로렌조 교회, 산 베니토 수도원. 까미노를 따라 도시를 가로지르며 과거로 시간 여행을 하는 기분이었다. (c)밀린 일기



도시 외곽 석탑에서 오늘의 알베르게를 정했다. 로마 석탑 아래서 지도를 펼쳐놓고, 이번엔 뻔하지 않을 길을 택했다. 남들이 잘 가지 않은 길을 걸어보는 순간이었다. 아스팔트 도로보다 먼지가 이는 흙길이 아무래도 끌렸기 때문이었다.

잔머리를 써 지름길로 가려고 철도를 가로질렀는데 그 너머에 마른 잡초밭을 만나 빠져나오려고 애를 먹었다. 유명하지 않은 길은 이유가 있었던 듯 일행은 도중에 자주 길을 잃었다. 결국 깔자디야로 향하는 마지막 흙길에서 조우했다. 땀범벅이 된 페데리코를 만났는데 우리보다 앞서 나간 그가 우리 뒤에 따라오고 있어서 모두 어리둥절이었다.

한 길로 죽 이어진 길 위에 점점이, 눈길 닿는 곳이 세상의 끝이라면 온 세상에 오로지 순례자 친구들 뿐이다.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된 듯한 우리였다. (c)밀린 일기


깔자디야 마을은 아주아주 작아서 알베르게가 한 손에 꼽을 정도였다. 우리는 저녁이 좀 더 맛있는 집으로 골랐고 정원으로 이어진 문을 지나면 드넓은 들판이 펼쳐지는 멋진 곳이었다. 햇볕이 가득 내리쬐는 바람 잘 통하는 빨랫줄에 침대를 말리곤 야외 테이블에 둘러앉아 카드놀이와 젠가를 했다. 까미노 초반에는 걷기만 해도 지쳤지만 점점 체력이 쌓여 숙소에 도착 후 여가시간을 보낼 정도였다.

저녁을 기다리며 도란도란 대화를 나눴다. 절대 막내처럼은 안 보이는 애늙은이 페데리코, 러블리한 애교쟁이 수지, 잘 웃지 않는다고 페테리코에게 항상 놀림받지만 실은 사려 깊고 친절한 디아나, 똑똑하고 사교적인 릭, 순례자에서 만난 영혼의 단짝 요한나, 오늘 하루가 너무나 길었던 H. 생장에서 출발해 산티아고까지 거지 반을 온 이 순간, 곁에 있는 친구들이 몹시도 애틋하게 느껴졌다.

매거진의 이전글 (#082) 2018. 9.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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