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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린 일기 Nov 25. 2020

(#084) 2018. 10. 2.

Puente Viallarente 32.8km

까미노의 끝에 다가올수록 이따금 돌아오는 화살표를 찾았다. 순례자의 길은 본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했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 끝이 난다. 산티아고를 향하는 사람에게는 Ultreia (Let’s go furher), 마주 보며 돌아오는 사람에게는 Et suseia(Let’s go higher)이라고 인사한단다. 오래전에는 자주 쓰였다는데 지금은 부엔 까미노! 면 충분하다.

오늘도 어김없이 포착한 유니콘 스카이. 주변이 탁 트인 평원이라 거리감이 사라져 완전히 다른 세계에 있는 듯 하다. (c)밀린 일기



브라질에서 온 아우비오는 생일 자축 겸 버킷 리스트를 이루려 까미노에 왔다고 했다. 리오 데 자네이루 출신이라는데 그토록 자주 들어온 이름의 뜻이 ‘1월의 강’인 것을 그를 만나 알게 되었다. 아우비오는 산티아고는 출발지에 서서 걷기 시작했을 때가 아니라 까미노에 가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이미 시작된다고 말했다. 나는 중학생 때 읽은 책 한 권이 계기이니 그의 말을 빌리자면 나의 까미노는 이미 시작된 지 십 년도 넘은 셈이다. 산티아고까지 무사 완주와 미리 생일 축하를 전하며 아우비오와 헤어졌다. 무슨 이유이든 만나는 사람들 모두가 길 위에서 마음속 깊이 성찰을 하고 있다. 그래서 이렇게 대화를 하며 그 깊이를 엿볼 때 내 속도 더 여물어간다.

이파리 한 장 없이 누군가 길에다 뿌린 듯 돋아난 보라색 꽃. 이른 아침 여린 꽃잎에는 얕은 서리가 내렸다. 문자 그대로 꽃길을 걸으며 또 한 번 감상에 젖는다. (c)밀린 일기



분명 요한나와 H랑 함께 출발했던 것 같은데 마을을 떠나 걸어 나오며 혼자가 되었다. 산으로 들로 나무 숲으로 걸어가는 동안 앞서 만났던 낯익은 얼굴들과 재회하며 건강을 살피고 필요한 것을 묻는다. 다정한 사람들. 얻는 것이 많아 마음의 허기가 찬다. 들판을 벗어나 만난 첫 카페에서 생 오렌지 주스를 시켜놓고 쉬고 있던 중 뒤따라오던 수지를 만났다. 우리는 잠시 앉아 곁에 다가온 고양이도 쓰다듬고 이른 아침의 고요를 즐기며 대화를 나눴다. 무리로 다니면 두루 친해져도 각각 말해볼 기회는 적어 아쉬웠던 차에 알맞은 시간이었다. 다만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다시 까미노로 돌아가느라 조금 헤맸다.

중간 마을 만시야에 장이 섰다. 여기서 요한나랑 H와도 다시 재회했다. 우리는 오늘 머물 알베르게를 정한 뒤 저녁은 신선한 과일과 야채로 직접 요리해 먹기로 했다. 동네 사람들이 조그마한 광장을 가득 메운다. 일상의 소음과 강렬한 햇살에 먹음직스러운 과일들이 순례자들을 불러 모았다.

만시야 벼룩시장. 신선한 과일은 보기에도 좋고 맛도 좋았다. 하몽과 치즈를 파는 트럭에서 인심 좋은 주인이 간단한 핀쵸스와 와인을 나눠주었다. 메 구스또 에스빠냐! (c)밀린 일기



저녁 메뉴는 라따뚜이와 삶은 감자였다. 항상 사 먹어 버릇하다 보니 신선한 음식이 그리워진 요한나가 오늘의 요리사였다. 셋이 식재료를 공평히 나눠지고 푸엔테 비야렌테로 향했다. 푸엔테(스페인어로 다리라는 뜻) 시작하는 마을을 하도 만났더니 이제 이 말이 있으면 마을에 유서 깊고 멋진 다리 하나쯤 만나겠거니 하고 있다. 좀 이따 뱃속을 채울 것이지만 한껏 무거워진 가방을 지고 마을로 들어가는 마지막 한 걸음을 겨우 떼었다. 한적하고 조용한 마을과 넓고 쾌적한 알베르게가 아주 좋았다. 일단 야외 정원으로 직행해 생맥주와 치즈, 크래커를 먼저 먹었다.

노상 빛 바랜 들판만 보다가 푸른 잔디 밭을 만나니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잔디 밭에 누워 스트레칭을 하고 해를 맞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c)밀린 일기


미국에서 온 데보라는 8년 전 암 진단을 받고 수년간 치료와 재활을 거쳤다. 지금은 살면서 정말 해보고 싶던 일들을 하는 중이라고 했다. 혼자 떠난다고 했을 때 손녀딸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지만 거의 매일 통화하며 소식을 주고받는 듯하다. 삶의 끝에 다다랐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곳이 까미노였다니. 데보라의 말을 듣고 나니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을 때 하는 것이 얼마만큼 귀중한 순간이고 행복인가 곱씹게 되었다.

오늘의 요리사 요한나가 준비한 라따뚜이. 별다른 소스 없이 신선한 재료 맛이 두드러진 건강한 한 상이었다. (c)밀린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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