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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린 일기 Nov 26. 2020

(#085) 2018. 10. 3.

León 13.54km

부르고스에 이어 또다시 대도시 입성이다. 여유롭게 도시에 도착하기 위해 며칠을 좀 무리해서 걸었었다. 전날 머문 푸엔테 비야렌테는 주민이 대략 200명쯤 되는 작은 마을이었고 그 덕에 상점이며 거리가 아주 귀여웠다. 그런 곳을 출발해 레온으로 향하려니 한 걸음씩 가까워질수록 마음은 계속 부풀어 오른다. 까리온에서 받았던 렌즈가 몇 개 남지 않아서 대도시에 간 김에 안경점을 들릴 계획이다.

도시의 상징마저 사자였던 그 이름도 충실한 레온. 마을에 대한 자긍심이 엄청난지 곳곳에 레온의 상징물이 차고 넘쳤다. (c)밀린 일기



레온에 입성하기 직전 복병을 만났다. 바로 등산. 더디지만 착실히 걷고 있는 발걸음에 맞춰 때아닌 등산을 하게 되었다. 첫날 무리해 무릎이 아픈 뒤로 무릎 보호대를 번갈아 끼며 걷던 차에 등/하산은 너무나 두려운 구간이다. 다행히 자갈 밭은 없었지만 흙길이 미끄러워 내려가는 동안 무척 긴장했었다. 요한나와 H, 나와 걷는 동안 어제 오후부터 잠시 걸었던 브랜든을 다시 만났다. 회계사인 그는 연차의 반을 써 까미노에 왔고 휴가일수가 모자라 남는 구간은 내년에 다시 찾아온단다.

까미노 위의 도시는 순례자에게 친절하다. 도시에 입성하자마자 스스로 쎄요를 찍을 수 있게 되어 있고 사탕을 선물로 받았다. (c)밀린 일기




우리는 올드타운에 머물 예정이라 중세시대 흔적이 물씬 느껴지는 도시의 중앙으로 향했다. 아직도 남아 있는 Medival wall을 통해 도시는 올드타운과 신가지로 나뉘었다. 대도시에는 숙소 선택지가 아주 다양하다. 일부 순례자들은 기회가 있으면 대도시의 쾌적하고 넓은 호텔이나 사립시설에 머물기도 한다. 그럼에도 공립 알베르게를 선택하는 이유는 어쩌면 앞서 간 까미노 친구들을 다시 만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연락처를 알아도 약속을 정하기보다 우연한 만남을 더 반기게 된다.

정해진 시간에 선착순으로 열리는 알베르게에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다. 대기줄에도 벌써 얼굴을 아는 사람이 여럿이다. (c)밀린 일기



오늘 레온에는 중세시대 축제가 있었다. 축제는 밤에 즐겨야 제격이므로 잠시 흥분을 접어 두고 대성당으로 향했다. 성당 앞은 도시의 반가운 소란과 북적거림으로 가득 찼다. 안경점에서 렌즈를 새로 사고 기념품 가게도 들렀다. 나를 위해 첫 번째 까미노 기념품을 샀다. 친구에게 엽서를 부치고 광장에 둘러앉아 사람 구경을 하며 시간을 보내다 까리온의 이탈리아 셰프 클라우디오를 만났다. 뒤꿈치 물집이 너무 심해서 레온에서 며칠 쉴 예정이라고 했다. H도 체력을 정비하며 헤어지기로 했다.

기념 삼아 클라우디오와 사진을 찍고 예전 사진을 보여주던 중 우리가 이미 주비리에서 서로를 만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돌고 돌아 만나는 까미노의 우연은 정말 특별하다. 같은 장소에서 서로 반대편 사진을 찍고 있던 게 서로의 사진첩에 있었다. 열 손가락에 주기율표 원소 기호를 문신한 클라우디오. 금속의 의미에 대해 설명했는데 사실 정확하게 알아듣진 못했다. 균열이 생겨 깨진 금속을 이어 붙이는 물질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내가 이해한 바로는 서로 보완하고 상충하며 완벽해지는 것처럼 그 역시 그런 과정을 거쳐 원하는 지향점을 가고 싶다는 마음을 담은 것 같았다.

대성당이 정면으로 보이는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보통 여행을 가면 가야할 곳, 봐야할 곳이 많아 마음이 조급하지만 이토록 여유로운 한 때라니. (c)밀린 일기



대성당은 입장 시간이 정해져 있어 문을 닫기 전에 막차를 탔다. 쎄요를 받고 내부을 둘러보는데 이전에 들렀던 그 어떤 곳보다 관광지 느낌이 물씬 났다. 관람 코스도 정해져 있고 여러모로 정돈된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부르고스 대성당의 장대하고 웅장한 인상과 달리 우아하고 뾰족한 느낌이 났다. 내부의 스테인드글라스와 아치가 기억에 남는다. 오늘은 정말 들뜬 여행객의 심정으로 레온을 구경했다.

석양이 질 무렵, 길어진 해를 따라 색색의 스테인드 글라스가 빛난다. 종교적인 의미는 차치하고 신과 닿고자 하는 마음을 새겨넣은 마음이 아름다웠다. (c)밀린 일기



일행이 점점 늘어난다. 디아나와 릭, 페데리코와 스웨덴에서 온 마리가 합류했다. 여행자의 때를 벗지 못한 한 무리의 순례자들은 도시를 쏘다니며 분위기를 즐겼다. Flying tiger가 있어 들어갔는데, 우리 모두 여기가 예쁜 쓰레기를 파는 곳이라는 데에 동의했다. 서양 친구들도 Pretty but useless라며 농담했다. 세련된 도시 사람들 사이에 햇볕에 그을리고 여기저기 잔 부상을 입은 우리는 조금 꾀죄죄했지만 그 나름대로의 기분으로 다니니 재미있었다.

축제 퍼레이드를 준비하는 사람들과 가우디의 작품 사이에 마련된 축제 공간. 이 외에도 이곳 저곳이 축제로 흥겨웠다. (c)밀린 일기



와인과 커피를 마시며 자리를 옮기다 어느 노천 온천에서 디아나가 까미노에 온 이유를 듣게 되었다. 어딘가 쓸쓸한 얼굴로 늘 앉아 있던 디아나는 손가락에 아주 헐거운 반지를 끼고 있었다. 그는 약혼자의 죽음을 견디지 못해 슬퍼하다가 종잡을 수 없는 마음을 안고 무작정 까미노를 찾아왔다고 한다. 그 헐거운 반지는 전 연인의 것으로 디아나는 아직 약혼자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 덤덤히 털어놓는 속내에 일행을 잠시 말을 잊었다. 하오의 해를 맞으며 공중에 유영하듯 붕 뜬 마음이 순식간에 내려앉았다.

알베르게 근처에도 작은 교회 건물이 있었다. 축제장이 가득찰수록 도시의 뒤편은 인적이 끊긴다. 고요해서 평화로운 한때다. (c)밀린 일기



먹먹했던 마음을 갈무리하고 우리는 축제를 즐기기로 했다. 오늘은 켈틱 음악 축제, 중세시대 축제, 풍물시장, 소시지 페스티벌 등 거리 곳곳이 각양각색의 흥겨움으로 넘치고 있었다. 도중에 알베르토와 다니엘, 수지까지 모두 만나 우리는 열명이 넘는 무리가 되었다. 꼭 단체 관광객이 된 듯한 기분이다. 적당한 바를 찾아 와인을 주문하고 의자를 끌어다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게스트 하우스에서 동행을 만나 여행을 하는 기분과는 또 달랐다. 모두 까미노라는 같은 목표를 제외하면 공통점이 없었고 그래서 아주 느슨하고 자유로운 동맹이었다. 언제든지 나가고 들어올 수 있는 곳, 그렇지만 위로와 도움이 필요하면 항상 손을 내밀 수 있는, 그런 곳이다.

그리운 까미노 친구들. 그러나 까미노의 기억은 길에서 출발해 끝났다. 찰나 같아 더 소중했던 인연들이다. (c)밀린 일기



1차를 마치고 거리를 배회하다가 하비와 루이스를 만났다. 잊을만하면 마주치는 반가운 나의 스페인 아저씨들. 루이스의 동생이 놀러 왔다며, 레온의 유명한 하몽 집에 데려다주시겠다고 했다. 먼저번 일행과는 헤어지고 요한나와 나는 여기에 합류했다. 얼결에 루이스의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다. 생긴 것은 같아도 풍미와 부위가 다르다는 하몽은 그냥 다 맛있어서 구분이 무용할 지경이었다. 스페인 사람이 부위별로 하몽을 권하고 어울리는 와인을 추천해준다니 감격이 넘쳐흐른다.

햄을 이렇게 종류별로 시켜서 먹어볼 날이 오다니. 후식까지 멋들어지게 곁들인 훌륭한 야식이다. 장난꾸러기 하비는 사진 찍는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c)밀린 일기



수도원 알베르게는 심지어 통금이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진짜로 문을 잠근다는 말에 한껏 취한 우리는 몽롱한 정신에 달음박칠을 시작했다. 멀리서 켈틱 음악이 들여오고 횃불을 밝힌 길가를 지나 멈추지 않고 내내 달렸다. 틈틈이 구글 지도를 보며 재빠르게 길을 찾아 달리다가 마지막 몇 미터를 남겨두고 우리와 똑같이 달리는 페데리코와 디아나를 만났다. 다들 술에 취한 채, 늦을까 봐 헐레벌떡 달려오는 모습이 한결같아 도착 직후 숨이 넘어가도록 웃었다. 시간이 되자 진짜로 문이 잠겼고 하마터면 밤이슬을 맞을 뻔했다. 잠에 드는 그 순간까지 매분 매초 사연이 쌓이던 레온의 잊지 못할 또 하루가 저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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