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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린 일기 Nov 27. 2020

(#086) 2018. 10. 4.

Villa de Mazarife 21.8km

레온을 관광으로 왔다면 어땠을까. 둘러볼 곳이 많아 하루만 머무르고 떠나자니 아쉬움이 가득하다. 깜깜한 새벽에 길을 나서며 어제 신나게 쏘다니던 길거리와 광장을 다시 밟았다. 대도시답게 이른 아침부터 손님을 맞는 곳이 꽤 많았고 요한나와 나는 척 봐도 범상치 않은 빵집을 찾았다. 그러던 중 마침 근처를 배회하던 수지를 만나 함께 아침을 먹기로 했다. 수지는 대학생이라 개강 일정에 맞춰 레온에서 기차를 타고 돌아간다고 들었다. 요한나도 마찬가지로 논문학기를 보내고 있어 돌아가야만 했으나 교수님과 얘기가 잘 된 모양이었다. 까미노에 있다고 하니 오히려 행운을 빌어 줬단다.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문화에 녹아든 덕분인지 유럽 사람들에게는 순례자의 길이 퍽 자연스럽다. 정해진 일정을 미루고서라도 머무르며 걷고 싶은 길, 까미노다.

우연히 페데리코도 만났는데 알고 보니 수지와 아침에 잠시 만나 작별인사를 하려던 참이었다고 한다. 나와 요한나가 분위기를 다 망쳤다며 푸념했는데 수지도 무안한 지 조용히 웃고 있었다. 사랑이 싹트는 까미노! 하지만 금사빠인 페테리코의 연인은 단 한 사람일 수 없다는 걸 우린 이미 알고 있었다.

빵집에는 ‘순례자의 지팡이’라는 재미난 이름에 연유와 초콜릿이 한껏 발린 매우 달달한 빵을 팔았다. 카페 콘 레체와도 잘 어울리는데다  완전히 내 취향이었다. (c)밀린 일기



왁자지껄한 도시의 소음과 멀어져 간다. 레온은 정말로 큰 도시여서 외곽으로 나오는 데에만 거의 한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횡단보도를 이렇게 자주 만나 걷는 것도 참 오랜만이다. 도시로 들어올 때에는 무척 설렜지만 막상 나가자니 들러볼 수조차 없는 도시의 건물들이 얄밉고 조금 지겹기까지 하다. 수지가 기차를 타고 갔을 레온 역 근처도 지나고, 조금씩 착실하게 도시를 빠져나간다.

외관이 인상적인 건물로 소풍을 나온 유치원 아이들을 만났다. 우리를 포함해 지나가던 사람들이 하나둘 멈춰서 작은 인간들의 외출을 구경하며 귀엽다고 호들갑이었다. (c)밀린 일기



오늘 도착한 알베르게는 주변을 정성스럽게 꾸며놓아 호스트의 성품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순례자들에게 친근한 공간이라 잠시 머물러 가는 객이어도 금세 마음을 풀어놓고 쉴 수 있었다. 한두 사람이 시작해 벽에 빼곡히 적힌 메시지들에는 다들 이 멀고 험난한 길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잔뜩 적혀 있다.

물집 없이는 사랑도 없다. 걸어서 문제가 해결 된다면. 따위의, 재미있고 공감가는 글귀가 많았다. 그리고 오래된 순례자들의 신발 화분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c)밀린 일기



까미노의 지정학적 위치상 아무래도 길 위에는 유럽인들이 많다. 이제까지 독일인과 이탈리아 사람들 정말 많이 만났고, 미국인들 그리고 그 어느 나라보다 한국인들을 많이 만났다. 의외로 다른 아시아 사람들은 매우 드문 편이라 중국인과 일본인을 만나면 묘하게 반갑다. 그러다 여기서 한 무리의 마카오 친구들을 만났다. 그룹으로 함께 여행을 다니는 모양이었다. 여럿이면 밥 먹을 때 직접 요리해서 먹으면 훨씬 경제적이라서 좋다. 마침 저녁 시간이라 마카오팀은 샐러드를 비롯해 이것저것 준비했다.

오늘은 요한나 표 까르보나라다. 당번을 정한 것은 아니지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만들 수 있는 요리도 한정되어 있어 어쩌다 보니 요한나에게 신세를 자주 진다. 나는 주방 보조가 되어 요한나의 요리를 도왔다. 준비하면서 원조 까르보나라는 우유나 크림이 들어가지 않고 치즈와 달걀만 들어간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내가 맨날 먹던 건 그냥 크림 스파게티였다.

함께 식사한게 크리스토프인지 제리인지 헷갈린다. 그나저나 유럽인도 면 조절을 실패하는 모양이다. 먹어도 먹어도 절대 줄지 않는 까르보나라였다. (c)밀린 일기



푸짐한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왔다. 알베르게는 보통 혼숙을 하고 그래서 처음에는 조금 불편했다. 아일랜드인 제리와 까미노 뉴비 크리스토프가 함께였다. 까미노는 대도시마다 합류하거나 시작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 일정 중 한꺼번에 전 구간을 걷지 못하는 경우에는 시간이 허락하는 데까지 걷고 돌아갔다 다시 찾는 사람들도 많았다. 크리스토프는 레온에서 출발했는데 아직 물집도 근육통도 제대로 겪지 못한 새내기였다. 까미노에 왜 왔냐는 질문 다음으로 어디서 출발했냐는 질문이 이어지는데 나처럼 생장에서부터 출발한 사람들은 한껏 으스대곤 한다. 우리는 나름 까미노 선배였고 뉴비가 곧 겪을 온갖 우여곡절은 다들 한 번씩 겪었기 때문에 앞다투어 크리스토프에게 노하우를 전수했다.

마을로 들어가는 길에 본 까미노 표지석. 오늘은 누군가 두고간 등산화를 보았다. 필요한 사람에게 가거나 아니면 그대로 장식이 되어 시간에 스러져갈 것이다. (c)밀린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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