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torga 28.9km
초콜릿 생산지로 유명한 아스토르가. 오늘도 요한나와 함께 보폭을 맞춰 걸으며 드문드문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다. 애리조나에서 온 트레이시와 로리 모녀. 집안이 거의 스포츠계였던 것 같다. 남편이 스포츠팀 코치고 트레이시는 의사였다. 주 5-60시간씩 일하며 일상에 지쳐 많은 것들을 놓쳐버리고 문득 든 회한에 딸과 함께 까미노를 찾았다고 한다. 길에서 만난 미국인들은 영화나 드라마의 영향인지 말투부터 억양까지 미묘하게 친숙하게 느껴지면서 동시에 겉으로만 친절하고 마음이 담겨있지 않다는 인상을 받기도 했다.
중간에 들른 오스피탈 데 오르비고. 100년도 넘은 동네 빵집이 유명했다. 이런 곳은 또 빠트리지 않고 들리는 나는 빵순이었고, 요한나는 식품공학과라는 전공을 적극 발휘해 빵 사냥에 동참했다. 포근하고 고소한 빵 냄새가 주변 거리를 가득 채웠다. 빵집에 가까워질수록 기대감이 커지는 건 말할 것도 없다.
오늘도 짧은 등산을 했었다. 그러다 아스토르가로 향하는 마지막 고개에서 함께 길을 걷던 사람들을 쉼터에서 만났다. 런던에서 온 뱅커 애슐리, 보스턴에서 온 존, 아일랜드인 벤과 트레이시 모녀까지 모두 다시 만났다. 애슐리는 자기 할머니 이름과 비슷하다며 무척 반가워했다. 나는 애슐리가 남자 이름도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곤 무척 신기해했다.
모든 순례자에게 열려있는 공간은 과일이나 음료수, 물을 무료로 마시고 원하는 사람들에게 기부를 받는 형태였다. 대부분 받은 친절만큼 감사인사를 담아 기부를 한다. 그런데 약간 보헤미안 기질이 있었던 호스트가 한 무리의 미국인들과 약간의 언쟁이 붙었다. 대선 결과 때문에 미국인들은 자주 입방아에 오르내리며 놀림을 받았는데, 기부금을 크게 내려던 한 미국인에게 “미국인들은 돈이면 다 되는 줄 안다”며 뜬금없이 화를 낸 것이다. 기분 좋게 쉬다 가려는 자리에서 뭇매를 얻어맞은 친구들은 기분이 상했고 우리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아스토르가를 바라보며 커다랗고 못생긴 다리가 있다. 푸른색의 거대한 철제 다리는 빙 둘러 올라갔다 내려오는 구조였다. 거친 흙 밭을 걸어왔던 순례자들이 한 데 모여 올라가고 내려가는 모습은 사뭇 공장을 연상하게 했다. 그렇지만 이렇게 비효율적으로 다리를 건너는 방법은 모두의 원성을 사기에 충분했다. 목적지를 지척에 두고 걸음만 늦출 뿐이었기 때문이다.
아스토르가에 도착하자 늘 그렇듯 입구에 바로 있는 알베르게에 묶었다. 로리와 트레이시를 제외하고는 모두 여기 머물 모양이었다. 짐을 풀고 간단히 씻은 뒤 오늘은 도시를 좀 둘러보기로 했다. 수 세기 전 초콜릿 만드는 도시로 명망이 높았던 도시에는 초콜릿 박물관을 비롯해 이것저것 볼 것이 많았다. 근처를 배회하던 애슐리, 존과 벤도 함께 하기로 했다.
저녁에는 광장에 모여 다 같이 저녁을 먹었다. 또 다른 미국인 에밀리도 함께였다. 여행 후반에 미국인들을 더 많이 만났고 매번 출신지를 ‘주’로 소개해는 것도 겪을 때마다 생소하다. 로리는 엄마와 매일 감상을 녹화하고 있었다. 개인 SNS에 올리며 친구나 가족들과 소식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는데 모처럼 둘러앉은 김에 우리 각각의 한 마디도 담았다. 나는 까미노를 걸으며 찾은 그라피티가 인상 깊어 이걸 이용한 인사말을 남겼었다. 고통 없이는 영광도 없다는 식의 유명한 인용구를 이용해 말장난을 했던 것 같은데, 아쉽게도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그나저나 온갖 억양이 섞인 식사자리는 편의상 공용어를 쓰고 있으니 나는 매번 영어 듣기 평가를 하는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