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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린 일기 Nov 30. 2020

(#088) 2018. 10. 6.

Foncebadón 25.8km

섬처럼 우뚝 솟은 아스토르가를 떠나며 한 무리의 순례자들과 길을 잇는다. 언제나 그렇듯 규모 있는 도시를 지날 때에는 노란 화살표를 공들여 찾지 않아도 배낭을 멘 사람들의 행렬을 금세 발견했다. 오늘도 요한나와 함께였고 어제 그제, 혹은 그 이전에 만났던 사람들과 마주치며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마을을 빠져나오자마자 있는 작은 교회. 사람들은 서둘러 쎄요를 찍고 잠시 앉아 무탈한 하루를 빌었다. (c)밀린 일기



오늘은 산 정상에서 묶을 예정이었다. 까미노의 고개도 이제 몇 안 남았다. 지긋지긋하지만 동시에 뿌듯하기도 한 등산이 얼마 남지 않았다. 어느 마을 알베르게에 머물지는 정하지 않은 채로 발길 따라 흘러가기로 했다. 얼마쯤 지났을까. 산길을 걸으며 낯선 이와 만나 잠시 대화를 나눴다. 상대는 나이가 꽤 있으신 분인데 부모님을 여의고 슬픔을 극복하려 온 순례자였다. 이쯤 오면 앞으로 걸어갈 시간보다 지금껏 걸어온 순간이 더 오래되었기에 순례길 여정은 수월해지고 저마다의 노하우가 쌓이기 마련이다. 그 노하우에는 심신을 달래는 방법도 있고 그래서 간혹 정제되지 않는 감정을 내비치는 사람들을 만나면 조금 당황스러웠다. 생각해보면 길의 초반에 나 역시 쉽게 지치고 마음이 상하기도 하였으니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하는 처사다. 그의 마음을 보듬어 주지는 못했지만 어렴풋한 아픔에 공감하며 조용히 귀 기울여 주었다.

산으로 오르는 길 어드멘가 지팡이를 깎는 노인을 만났다. 지팡이가 없는 순례자는 있을리 없겠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나무 지팡이와 물통용 호리박을 만들며 소일했다. (c)밀린 일기



스페인 복판에서 미국 남부 느낌이 물씬 풍기는 바에 들렀다. 마을로 돌아가는 와중 쉴 곳을 찾다가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었다. 뜬금없는 카우보이 바는 사연이 있어 보였지만 아쉽게도 주인과 제대로 대화하지 못했다. 그래도 점심으로 먹은 엠파나다는 꽤 맛있었다. 나중에 트레이시 모녀와 재회하고, 존 일행과 만났을 때 스몰토크 소재로 딱이었다. 신기하게도 모두가 거길 들렀다 온 것 같았다.

앞선 길에도 몇번 마주쳤던 반려견과 여행하는 순례자를 또 만났다. 그의 동행인은 때때로 제 몫의 물과 밥을 등에 지고 걸었고 만나는 사람마다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c)밀린 일기



마지막 구간에 신기한 옷차림의 남자가 있었다. 중세 시대 풍 옷을 입고 사람들에게 매를 보여주며 호객을 하고 있었는데 Donativa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보아 모금 활동 중이었던 것 같다. 호기심도 동하고 진행하는 행사도 의미 있는 것 같아 우린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순례자들을 위한 이벤트가 날로 다양해진다. 음식이나 음악을 무료로 나누는 것 외에 이런 아이디어로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건 무척 멋진 생각처럼 느껴졌다.

매는 무척 아름답고 침착했다. 여러 사람들이 귀찮게 굴면 짜증이 날 법도 한데 달래는 남자의 말에 잘 따라주는 것 같았다. (c)밀린 일기



마을에 거의 다다랐을 때쯤 흥겹게 노래를 부르며 걷는 존 일행을 다시 만났다. 일행은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으며 금세 우리를 뒤쫓아 왔다. 애슐리의 영국 발음이 아주 듣기 좋아 우리는 한동안 British English에 대해 수다를 떨었다. 존은 못마땅한 눈치였지만 우리는 그때마다 하이파이브를 하며 존을 놀렸다. 애슐리와 존은 키가 아주 컸는데 간혹 만나는 키다리 사람들 중에서도 자기들도 꽤 큰 축이라고 했다. 발걸음 수로 비교해보니, 내가 애슐리처럼 걸었으면 벌써 도착해 지금은 돌아가는 중일 거라고 말하자 그는 진심으로 즐거워했다. 이런 류의 농담이 꽤 먹히다니 나의 국제 유머는 아직 녹슬지 않았다. 아참, 에밀리가 애슐리의 별명을 말해줬는데 친구들이 그의 성격이 개차반이라며 Trash와 Ashely를 붙여 Trashely라고 부른단다. 입에 짝 붙는 별명이다.

도중에 본 신기하게 생긴 우물. 조경 상태는 괜찮았지만 마시기엔 영 미심쩍어 간단히 목덜미를 적시며 더위를 쫓았다. 어쩌면 동물을 위한 것일까? (c)밀린 일기



폰세바돈은 아주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는 동네였다. 바람의 언덕에 지붕이 다 뜯어진 집도 간간히 보이고 사람들이 오래 머무는 곳이 아닌 분위기가 제대로 났다. 손님이 별로 없던 탓인지 우리는 운 좋게 공립 알베르게를 잡을 수 있었는데 막상 도착하니 아는 얼굴이 제법 많았다. 간간히 마주쳤던 한국인들도 있었다. 여기 공립 알베르게는 전 세계에서 봉사자를 받아 운영하는 곳이다. 내가 갔을 때는 까미노를 여행한 인연으로, 칠레인가 브라질에서 찾아온 자원봉사자들이 두엇 있었다. 식사부터 잠자리까지 모두 순례자들과 함께 준비했다.


쎄요를 기다리며 줄에 서 있을 때 존 일행이 도착했고 모두들 땀에 절은 신발을 벗고 양말 바람이었다. 재미있었던 게 먼지 쌓인 바닥 위에 각자 발자국이 찍혔는데 거인 같이 키가 큰 존과 애슐리는 내 발자국과 두배 넘게 차이가 났다. 나는 어쩌면 그렇게 발이 크냐고 했고 존은 그 작은 발로 어떻게 걸어 다니냐고 되물으며 서로를 놀렸다.

존의 큰 발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그가 아스토르가에 가는 길에 신발을 벗고 잠시 쉬고 있었는데 작달막한 프랑스인 할머니들이 어쩌면 그렇게 발이 크냐며 존의 신발을 신어보고 싶다고 했단다. 별 수 없이 신어보게 해 줬는데 자기가 꼭 신기한 볼거리가 된 것 같아 조금 언짢았다고 했다. 그 얘기를 어찌나 맛깔나게 하던지 꼭 토크쇼를 보는 기분이었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존은 미국 토크쇼 호스트 중 Jimmy Fallon이랑 제스처며 톤까지 비슷해서 닮았다고 말하자 자기는 싫어하는 사람이라며 질색을 했다.

다닥다닥 붙은 나무 이층 침대는 움직일 때마다 커다란 소리가 났다. 옴짝달싹 못하고 죽은 듯이 잠에 들며 웃풍에 몸서리쳤던 기억이 난다. (c)밀린 일기



알베르게가 아주 작아서인지 작은 소음에도 사람들은 금세 예민해졌다. 다행히 화장실은 남녀가 나뉘어 있었는데 졸졸 나오는 물줄기여도 온수여서 그런대로 만족했다. 근처 펍에서 한잔 한 후 춥고 고단한 몸을 이끌고 숙소로 돌아왔다. 바람이 어마 무시하게 부는 산 정상은 생각보다 너무너무 추웠다. 자정 즈음. 벌써 코를 어마 무시하게 고는 사람, 장난치느라고 방귀 소리를 흉내 내는 사람, 손녀딸과 큰 소리로 통화하는 데보라, 그 소리들이 시끄러워 음악 소리를 키운 다른 순례자들이 한 데 어우러져 시끄럽고 정신없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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