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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린 일기 Dec 01. 2020

(#089) 2018. 10. 7.

Ponferrada 27.2km

정상에 올랐으니 이제 내려갈 차례다. 만하린으로 가는 길목에 세워진 십자가는 동틀 녘이 아름답다고 들어서 걸음을 서둘렀다. Cruz de Ferro(철의 십자가)는 아스토르가에 원본이 있다고 한다. 오래전 산티아고 대성당이 건축될 당시 성당을 찾아가는 순례자들은 건축에 필요한 돌을 가져와 달라는 청을 받았단다. 그 유래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지금은 순례자들이 고향에서부터 돈을 가져와 이 십자가 아래에 두고 까미노의 상징성을 더하고 있다. 게다가 십자가는 눈이 왔을 때 이정표가 되어주기도 한단다.

용서의 언덕에서는 무언가를 용서했다면 철의 십자가는 가지고 왔던 무언가를 두고 가야 한다. 누군가는 편지를, 조개를, 팔찌를, 고향에서 부터 들고 온 돌을 쌓아두었다.

나는 까미노 초입에서 주운 아몬드를 두고 왔다. 십자가 탑은 거대한 동산이 되었고 발 밑에는 세계 곳곳에서 모아진 순례자들의 사연이 가득했다. (c)밀린 일기



철의 십자가를 등진 채 어제 잠시 머물까 고민했던 만하린을 지난다. 개성 있는 외관으로 도전 정신 가득한 순례자들이 찾는 곳이다. 나중에 여기서 머문 디아나와 페데리코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전기가 없어 장작불을 떼고 물을 사용할 수 없는 다소 투박한 곳이라고 들었다. 이색적인 분위기도 좋지만 순례자들에게 경계의 대상인 빈대가 출몰한다는 이야기까지 듣자 피해 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모 여행 프로그램에서 이 알베르게가 소개 되었던 것 같다. 지난 밤 허술한 알베르게 건물도 너무나 추웠는데 나무 오두막은 견디기 어려웠을 것 같다. (c)밀린 일기



서쪽으로 갈수록 점점 추워졌다. 가지고 온 옷을 다 털어도 부족해 폰페라다에 도착하면 스포츠 용품점에 들르기로 했다. 산은 오를 때는 괜찮지만 내려갈 때에는 무릎에 부담이 되어서 오늘은 배낭을 동키 서비스에 맡겨 보냈다. 알베르게 근처 상점에서 동키를 신청하느라 비몽사몽 한 아침부터 분주했다.

산 꼭대기 관목들 잎사귀에 서리가 내렸다. 불과 며칠 전에는 메세타를 해매며 가을 더위에 힘들었는데 어느새 가을이 깊어지고 있다. (c)밀린 일기



만하린을 지나 산세는 완만해졌다. 보폭을 좁히며 걷다가 그룹으로 여행을 온 그레험을 만났다. 까미노에서 만난 첫 번째 호주인이다. 한창때 사업을 하다가 지금은 비즈니스 컨설턴트 일을 하신단다. 그레험은 나와 요한나가 어떤 일에 관심 있는지, 또 우리가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 장황하게 설명했다. 중간 쉼터에서 일행을 기다리며 함께 커피도 마셨는데 사업을 오래 하신 분 특유의 말발이 인상적이었다. 그나저나 크루즈 여행처럼 부유한 여행자들은 위한 까미노 그룹 여행도 있다니 신기했다.

저 멀리 건물이 모여 있는 곳이 폰페라다일까? 피레네를 넘을 때와 비교하면 시야도 훨씬 넓도 몸도 가뿐해 걸을만 했다. (c)밀린 일기



점심은 몰리나셰카에 들러 먹었다. 카페테리아에 도착하자마자 튀김 냄새가 너무나 고소해, 나는 오징어 튀김을 주문했다. 화이트 와인을 곁들이며 요한나와 완벽한 식사라고 외쳤다.

몰리나셰카는 마을로 들어가는 다리부터 아주 아름다운 곳이었다. 주변에는 경취에 취해 자리를 잡은 순례자들과 잘 차려입은 마을 주민들이 한데 어울려 점심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 산행 끝에 만난 쉼터는 무척 달갑고 동화 같은 분위기가 넘쳤다. 충동적으로 발걸음을 멈춰 머물다 가고픈 곳이었다.

화장한 하늘 아래 그림같은 마을은 정말로 동화 같았다. 인구가 채 천 명이 안되는 이 작은 마을은 지나는 순례자들로 일상이 북적이는 곳이었다. (c)밀린 일기



산에서 내려와 다시 도시에 닿는다. 애슐리가 폰페라다까지 걷고 돌아갈 예정이라고 들었는데 아쉽게도 작별인사를 하지 못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소식이 그리운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갔다.


오늘은 저녁 식사까지 나오는 알베르게를 잡았다. 점심은 근처 편의점에서 간단히 먹은 뒤 느긋한 오후를 즐겼다. 편의점에는 척 봐도 순례자 같은 사람들이 이미 여럿이었다. 알베르게는 알음알음 찾는 사람이 꽤 있는 듯, 가정집을 꾸민 작은 곳인데도 손님이 더 있었다. 그곳엔 산에서 만난 스위스 가족도 함께였다. 아이 셋과 다니는 일행은 방학을 맞아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어 까미노를 찾았다고 들었다. 아이들은 제 몫의 배낭을 지고 킥보드까지 타며 잘도 걸어 다녔다. 식사를 기다리며 포근한 응접실에 둘러앉아 대화를 나누다가 한국어가 신기한 아이들에게 이름 쓰는 법을 알려주며 놀았다.

식사시간이 다가오는지 부엌에는 금세 맛있는 냄새가 가득 찼다. 언제 어느 때건 밥 짓는 내음은 마음을 참 훈훈하게 덥혔다. 메뉴는 두 가지를 선택할 수 있었지만 전부 맛있어 보여서 고르기가 무척 어려웠다. 수제 디저트까지 훌륭한 정찬을 마치고 방에 들어가 일찍 쉬었다. 흰색으로 정갈하게 꾸며진 이 층 침대며 방 분위기는 꼭 친구 집에 머무는 듯 정겨웠다. 사람들과 마구 부대끼다가도 가끔은 이런 분위기가 그리워지는 것 같다.

알베르게는 순례자들이 남긴 기념품이 가득했다. 그중엔 한국인이 남긴 시도 있었고 요한나의 요청에 어설프게 번역을 해주었다. 감상이 담기지 않아 조금 아쉬웠다. (c)밀린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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