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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린 일기 Dec 02. 2020

(#090) 2018. 10. 8.

Trabadelo 32.3km

트라바델로까지 가는 길도 프랑스 길 외에 샛길이 있었다. 인적이 드문 길을 원한다면 언덕을 지나면 되고 아니라면 그대로 도로를 따라 걸으면 된다. 폰페라다의 중심지를 지나며 도시의 상징인 성을 지난다. 어슴푸레 밝아오는 하늘에 회색빛 성벽은 주홍으로 물들었다. 성 안에는 중세 갑옷이나 다른 볼거리가 전시되어 있다고 들었지만 전진뿐인 우리에게 잠시라곤 없었다.

깨알 같이 표시된 순례자의 길 마일스톤.성벽은 꽤 거대해서 둘러 지나는 동안 그 위용을 대단했다. (c)밀린 일기



제법 추워진 날씨에 스포츠 용품점에 들러 필요한 물건들을 사기로 했다. 사실 요한나와 며칠 전부터 여기 들르기를 무척 고대하고 있었다. Decathlon은 프랑스 브랜드 편집숍인데 마침 폰페라다에도 지점이 있었다. 갈 길이 멀었지만 쇼핑 앞에서는 도리가 없었다. 나는 하의와 장갑, 스포츠 목도리를 샀고 요한나도 장갑과 Thermal trouser이라는 바지를 샀다. 방한 바지는 발음이 어렵고 독특해 직원에게 위치를 물으며 혀가 꼬였고 우리는 다 같이 웃었다. 별 것 아닌 일도 풀어진 마음에는 커다란 즐거움인가 보다. 방한 바지나 목도리도 까미노에서 만난 다른 순례자들에게 추천받아 샀다. 먹거리나 용품, 길이나 알베르게까지 순례자들은 귀중한 정보를 서로 나누고 권하는데 아낌이 없다. 아름다운 인류애다.


신나게 쇼핑을 마치고 옆 맥도널드에서 아침을 먹었다. 어차피 출발이 늦은 김에 배부터 제대로 채우자는 심보였다. 가게마다 시그니처에 도전하는 나는 스페인 맥도널드에만 있는 메뉴를 골랐고 요한나는 무난한 걸 주문했던 것 같다.

우리나라에도 맥 카페에 베이커리가 있던가? 저렴한 가격에 놀라고 메뉴 가짓수에 놀라는 스페인 맥도널드다. 외국에 나가 들리면 묘하게 마음이 편해지는 맥도널드. (c)밀린 일기



중간에 들렀던 마을은 와인 산지로 유명했다. 본 투 비 와인 러버 요한나에게는 들릴 수밖에 없는 곳이다. 좁은 골목을 따라 늘어선 옛 돌벽이 인상적인 동네의 카페테리아에 자리를 잡았다. 몇 번 만난 적 있는 데보라도 함께다. 두어 번 마주치면 반가움에 꼭 함께 사진을 찍곤 했다. 경쟁하지 않아도 되는 길이란 게 이토록 여유롭다.

카카벨로스 중심지로 들어가는 길에 보았던 끝없는 포도밭. 매일 와인을 마시고 알알이 맺힌 포도알이 익어가는 계절의 까미노는 끝없이 풍요롭다. (c)밀린 일기



산길이 다시 시작될 때 즈음 뉴요커 제러드를 만났다. 아주 단출한 배낭에 가벼운 운동화를 신고 씩씩하게 걷고 있었다. 남루한 행색에 약간 도인 기질을 풍겼는데 뉴욕에서 침술사를 하며 나름 철학을 가지고 있는 친구였다. 미국에서는 사회 과학을 전공하면 보통 로스쿨에 진학한단다. 제러드는 그게 싫어 진로를 고민하다 방황 끝에 침술사가 되었고 지금 삶이 행복하다고 말했다. 침술이 작동하는 원리에 대해 상당히 장황하게 이야기했지만 동양에서는 ‘기’라는 단어로 해결된다니까 어쩜 그렇게 간단명료하냐며 부러워했다. 제러드는 까미노의 끝까지는 못 가지만 50마일 챌린지(사실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를 도전하는 중이었다. 50시간 동안 맥주 50캔을 먹으며 50마일을 가는, 듣기만 해도 정신 나간 챌린지였다. 우리는 그의 성공을 기원하면서도 동시에 우려 담긴 잔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트라바델로에 도착해 우리는 직관적으로 알베르게를 찜했다. 레온에서 해어진 수지를 추억하며 알베르게 이름이 수지인 곳으로 곧장 갔다. 제러드도 잠시 들려 목을 축이고 갔다. 늦은 오후, 자리는 금방 맥주에 와인 파티로 변했다. 옆 건물 알베르게에서도 손님들이 들려 자리는 점점 커졌다.

‘수지의 집’ 알베르게. 작달막한 굴뚝에는 순례자들의 저녁이 익어가는 연기가 퐁퐁 피어 올랐다. (c)밀린 일기



까사 수지는 몇 년 전 까미노를 걷다 길과 사랑에 빠지고 운명의 단짝을 만난 호주 출신 수지가 차린 알베르게다. 신랑은 스페인 사람으로 역시 까미노를 걷는 중이었다고 한다. 첫눈에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은 그 뒤로 장거리 연애를 하며 오랜 인연을 이었고 바로 얼마 전 예비 남편이 수지에게 청혼을 했다고 한다. 흘러갈 뻔한 인연의 끈은 생각보다 선명해 지금까지도 여러 순례자들을 엮어 주는 알베르게를 차리게 만들었다고 한다. 저녁식사는 수지가 준비해줬는데 콩을 잔뜩 넣은 카레는 강렬한 향에 비해 맛은 평범해 지친 순례자들의 입맛을 사로잡기에는 아쉽지만 조금 부족했던 것 같다.

알베르게에는 예비 부부가 직접 다듬고 가꾼 귀여운 소품이 가득했다. 공간마다 정성이 묻어나 아주 정겨운 곳이다. (c)밀린 일기



침실은 커다란 방에 침대를 둔 형태였다. 곳곳에서 모인 순례자들이 잠들 때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오늘은 미국인들이 유독 많았다. 그중에 엄마와 함께 여행을 하는 초등학생 여자아이가 있었다. 방학이 아닌데도 엄마와 함께 세상을 배우러 여행을 왔다고 한다. 나이 지긋한 몇 사람을 포함해 나 또한 이 좋은 까미노를 더 어릴 때 경험할 수 있는 아이를 대견하다 여기며 부러워했다. 한편으로는 세상을 더 겪고 길 위에 서면 보이는 게 다를 거라 안타깝게 여기는 축도 있었지만 걷는 것 자체로 느끼고 배울 수 있는 것들이 널린 까미노는 길지 않은 아이의 인생에 훌륭한 선생님이 될 것이라며 모두들 축복을 아끼지 않았다. 아름다운 공간에 아름다운 것들이 모여 나누는 이야기마다 무척 따스했다.

수지의 집은 동화 속에 나오는 집 같았다. 많은 것들이 생략된 공간은 다소 추웠지만 집의 옛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리모델링을 최소화했다는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c)밀린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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