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밀린 일기 Dec 03. 2020

(#091) 2018. 10. 9.

La Laguna 16.1 km

라구나는 순전히 다음 마을까지 갈 기력이 달려서 자연스럽게 멈춘 곳이다. 까미노의 높은 산도 이제 막바지다. 생장에서 받은 Elevation map으로 나날이 오르내리는 길을 가늠해 본다. 팜플로나 이후로 가파른 내리막길을 걷는 날이면 동키를 보내고 더 조심히 걸으려고 신경 쓴다. 어쩌면 생에 단 한번 일지 모르는 기회를 잡은 것에 감사했다. 넉넉하진 않아도 훌쩍 떠날 수 있는 자금과 시간이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모두 놓아버리고 싶을 만큼 힘들었던 때를 피해 떠날 수 있어서 감사했다.

하얗게 비어버린 마음속에 두 번은 없을 추억이 쌓이고 심신이 다시 고통에 쌓여도 또다시 훌훌 털어버릴 수 있다는,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 꼬박 한 달을 걸으며 몸소 깨닫는다. 뻔하고 진부해서 좋았다는 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아까워 소중한 시간들이다.

오 세브레이로에 가는 길은 꼭 반지원정대를 떠나는 기분이 들었다. 고도가 올라갈수록 관목은 낮아지고 새파랗던 입들이 붉게 물들어갔다. (c)밀린 일기


땅만 보고 걷다 보면 한 번씩 선물처럼 멋진 순간들이 찾아온다. 본격적인 등산을 하며 올라가던 중 작은 마을을 지났다. 목마른 순례자를 위한 작은 약수터 물은 참 달고 시원했다. 근처를 지나던 고양이도 멈추어 물을 마셨고 할아버지 순례자 한 분이 그런 고양이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평화롭고 느린 산등성이 마을은 마을 주민들 조차 자연이 묻혀 고요해 보였다.

낯선 이들이 곁을 맴돌거나 말거나 제 할일하며 지내는 고양이와 개들. 다시 태어나면 이들처럼. (c)밀린 일기



트라바델로의 까사 수지에서 같이 하루를 보냈던 순례자들이 점심을 권했다. 함께 밥 먹은 인연으로 모두들 얼굴과 이름을 아는 사람들인지라 자연스럽게 말을 섞으며 자리를 잡았다. 튀기고 볶은 요리에 물렸을 때 마침 채식주의 식단에 깔끔한 메뉴가 아주 마음에 드는 곳이었다. 과채주스와 채소로 속을 채운 크레페로 가볍게 한 끼를 때운다.

이 카페는 알베르게도 운영했는데 알고 보니 채식주의 식단으로 소위 힙하다는 유럽인들이 일부러 찾아가는 곳이란다. (c)밀린 일기



숨을 헐떡 거릴 때쯤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장거리는 아니었지만 높이를 생각하면 꽤 험난한 여정이었다. 문득 폰세바돈을 오를 때 요한나가 해주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요한나가 어렸을 적에 친구가 알려준 비밀 이야기였다. 듣자 하니 우리 모두 우리를 돌아봐주는 보이지 않는 천사를 곁에 두고 있단다. 우리가 가장 나약하고 힘든 순간, 그중에서도 정말로 이겨낼 수 없을 때 천사는 조용히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우리가 절망에 빠지지 않도록 해준다고 한다. 요한나도 내색은 안 했지만 폰세바돈을 오르며 배낭이 무겁고 힘들었는데 마음속으로 간절히 천사를 부르자 문득 등을 밀어주는 바람이 불어와 한결 수월하게 걸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나의 천사는 요한나를 비롯해 내게 다가와 주었던 까미노의 모든 사람들일 테다.


와인 산지로 유명한 곳의 덕을 톡톡히 본다. 한 병에 1유로 남짓한, 라벨 조차 수제로 붙인 이 고장 와인을 한 손에 찾아 쥐고 베란다에 나와 석양과 함께 마셨다. 세탁비를 아끼려 빨래에 조인한 캐나다인 애나와 오랜만에 다시 만난 패티나도 함께였다. 까미노의 사람들은 모두 아침 일찍 카페 콘 레체와 늦은 저녁에 곁들이는 와인 한 잔 어쩌면 한 병을 입을 모아 찬양했다. 언제인지 모를 정도로 서서히 취해 몽롱해도 잠에 들어 이튿날 아침이면 개운하게 길을 나설 수 있었다. 매일 커피와 와인을 마셔도 불면증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니 행복한 삶이다.

새파란 하늘 아래 기다란 빨랫줄에 사람들의 빨래가 널렸다. 바람이 세게 불면 잽싸게 뛰어가 제자리를 벗어난 것을 낚아챘다. (c)밀린 일기


매거진의 이전글 (#090) 2018. 10. 8.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