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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린 일기 Dec 05. 2020

(#093) 2018. 10. 11.

Barbadelo 21.8km

산티아고까지 100 킬로미터 남짓. 사리아를 지나면 금세 목적지에 도착할 것이다. 날이 스산하고 어두운 게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았다. 생장에서 비싼 값 치르고 준비한 우비가 빛을 바랄 때다. 도시로 들어가는 마을과 길목에는 순례자들을 반기는 무료 쉼터가 많았다. 한 번은 손수 만든 핫 케이크를 권하고 돈을 강탈하는 마을 주민을 만나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친절한 분위기와 음식들로 발걸음을 잡았다. 그래도 즐긴 만큼 성의를 보여야 할 것 같아 마음은 편치 않다.

순례자들이 오래된 돌벽으로 둘러쌓인 마을 작은 쉼터에 모여들었다. 벌써 제이콥의 조개를 두고 가는 이들이 있었다. (c)밀린 일기



순례자들은 보통 점심에 Menu del dia, 오늘의 메뉴를 시켰다. 간단한 전채나 일품요리, 디저트와 와인이 제공되는 식이다. 스무 날을 넘게 그런 메뉴들만 먹었더니 오랜만에 피자가 먹고 싶었다. 중소 도시 사리아를 향하며 요한나와 피잣집을 열심히 검색했다. 기왕에 먹는 거 유명한 집에 들르고 싶었다. 처음으로 노란 화살표가 가리키던 길을 벗어나 도시를 탐방하던 순간이다.

오래 굶주린 만큼 우리는 가볍게 1인 1파자를 해치웠다. 다른 순례자들도 가끔은 이런 음식이 그리웠던 듯 우리를 이어 가게를 찾는 손님들이 꼬리를 이었다. (c)밀린 일기



이제까지 걸어온 거리를 생각하면 산티아고는 이제 지척이다. 레온-카스티야 주를 벗어나 갈리시아 지방으로 들어왔다. 가는 길에 먹을 갈리시아 풍 문어 요리를 고대하며 매일 걷는다. 갈리시아는 산티아고 콤포스텔라가 있는 지역이라 순례자들을 위한 준비가 잘 갖추어져 있다. 이전까지는 도시마다 특색 있는 공립과 사립 알베르게가 있었지만 갈리시아에 들어오면 주에서 운영하는 비슷한 모양에 가격도 저렴한 알베르게를 금방 찾을 수 있다. 우리는 사람들이 잘 머무르지 않은 작은 알베르게에 자리를 펴기로 했다. 얼마나 작은 곳이었냐면 접수처에서 순례자들에게 줄 거스름돈 조차 제대로 없는 곳이었다. 작지만 쾌적한 공간은 우리끼리 머물며 마음에 드는 침대를 고를 수 있었다. 길에서 제외한 티나와 나, 요한나 그리고 러시아에서 온 부부가 머무르게 되었다.

주방에는 순례자들에게 무료로 나눠주는 우유가 있었다. 양심껏 한 개씩 마시는 우유는 아주 고소하고 든든해 다음날 아침식사로 아주 그만이었다. (c)밀린 일기



공립 알베르게는 주방과 저렴한 가격이 아주 마음에 들었지만 저녁을 사 먹을 수가 없어 조금 불편했다. 식재료라도 준비하면 뭐라도 해 먹을 텐데 상점조차 없어 난감했다. 다행히 알베르게에 향하다 만난 에밀리가 사립 알베르게에는 식당이 있다고 알려줬다. 방 값 보다 비싼 식대를 지불하며 조금 아쉬웠지만 오랜만에 만난 반가운 얼굴들과 어울리며 좋은 시간을 보냈다. 스위스에서 온 노래하는 순례자 한 명과 아냐 가족들을 필두로 순례자 노래를 불렀다. 까미노를 오고 가는 사람들끼리 서로에게 해주는 인사말을 담은 노래였다. 식당에 모인 사람들 모두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식전주를 대신했다.

까미노의 마지막 구간은 영혼의 길이다. 목적지에 다다르며 각자 영혼을 씻고 가다듬으며 마지막을 준비한다. (c)밀린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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