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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린 일기 Dec 06. 2020

(#094) 2018. 10. 12.

Gonzar 26.2km

산티아고까지 100 킬로미터. 이제 곧 목적지에 다다른다. 새어야 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매일 걸어야 하는 일상의 발걸음에는 자꾸 미련이 실린다. (c)밀린 일기



사리아를 지나 100km 지점을 지척에 두고 프란체스코와 함께 걷게 되었다. 형제 많은 집 첫째인데 곧 집안 첫아기가 태어난다고 한다. 아르헨티나 출신이고 지금은 스페인에 사는 중이라고. 지내는 동안 다양한 스페인 문화를 체험하고 싶어서 사리아에서 순례자의 길을 출발했다고 한다. 이 뉴비는 친절하게도 우리 자랑을 다 들어줬다. 얼마나 힘들었는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우리는 한참이나 떠들었다.

포르토마린에 도착해 함께 점심을 먹기로 했다. 술에 정통하다는 그 덕분에 과실주에 베일리스랑 비슷한 특별한 술도 먹어봤다. 술이 어찌나 독한지 잔을 꺾고 제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를 정도였다. 주변에 있던 스페인 사람들이 귀엽다는 듯이 웃어댔다.

포르토마린으로 향하는 다리. 마을까지 가는 다리 길이도 무척 길었지만 입구까지 올라가는 계단도 가파랐다. (c)밀린 일기



사리아에서 출발하는 순례자들을 Soft egg라고 불렀다. 생장이나 팜플로나 하다 못해 레온에서 출발한 순례자들은 신발도 닳고 옷가지도 낡은 채다. 그러나 사리아에서 출발하는 치들은 아직 상하지 않은 신에 스타일도 좋아 출발한 지 오래된 무리와 한눈에 구분되었다. 각자가 걸을 수 있을 만큼 걸을 수 있는 시간에 찾게 되는 까미노라지만 숱한 시간 고민과 가치를 논했던 길이 지금부터는 색다른 관광 코스가 되기도 한다니 기분이 이상했다.


벨기에에서 온 크리스틴은 벌써 2,300킬로미터도 넘게 걸었다고 한다. 오래 걷는 동안 무엇보다 손녀딸과 손자가 너무 보고 싶으시단다. 지난 세 달을 꼬박 길에 있었던 탓에 세상의 끝이라는 뜻의 피니스테라까지 걷고 나면 다음에 뭘 해야 할지 벌써부터 당황스럽다고 하셨다. 고작 당신의 사분의 일을 걸은 나도 이렇게 이후의 삶이 막막하고 기분도 묘한데 크리스틴의 마음이 감히 상상도 되지 않았다.

곤자르로 향하는 도중에 재미있는 가게를 만났다. 까미노를 많이 찾는 한국인 순례자들을 노린 듯 라면을 끓여먹을 수 있는 곳이다. 문득 스위스 인터라켄 정상에서 먹는 다른 만 원짜리 컵라면이 떠올랐다. 떡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가게를 찾은 김에 오늘 저녁에 먹을 라면을 샀다.

물을 올려놓고 보니 요한나가 준비를 돕는다며 라면을 그릇에 꺼내두었다. 인스턴트 라면을 먹어본 적이 있는 모양이지만 이 기회에 라면맛을 제대로 알려주기로 했다. (c)밀린 일기



매운 라면에 볶음김치와 즉석밥은 최고의 만찬이었다.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은 짜릿한 매운맛과 뜨끈하깔끔한 국물에 보양하는 기분이었다. 요한나도  먹어줘서 다행이었다. 김치 맛을 엄청 기대했는데 역시  먹는  달기만 해서 나는 좀 아쉬웠다. 언젠가 한국에 놀러 온다면 엄마의 김치 레시피를 알려준다고 하자 요한나가 진심으로 반겼다.


이제 채 사 일이 남지 않은 산티아고. 기분이 이상하다. 요한나는 좀 울컥했던 것 같다. 이 여정이 곧 끝난다니, 한편으로는 대단한 결말을 기대하기도 했지만 결국 나를 용서하고 나약함을 받아들이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여기 오길 참 잘했다. 행복하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이튿날 아침 노을이 장관이었다. 이토록 익숙해진 아름다운 풍경들이 벌써부터 그립다. (c)밀린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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