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밀린 일기 Dec 07. 2020

(#095) 2018. 10. 13.

Melide 33km

시람의 몸도 결국 어떤 장치와 같아서 자주 쓰면 닳는다. 아무 준비 없이 갖은 짐을 이고 나섰던 몸 여기저기가 너무 아프다. 엄지발가락은 마비된 듯 멍한 감각이 가시질 않는다. 요령 없이 하산하다 염증이 생겼던 무릎은 여전히 욱신거린다. 매일 몸에 무리를 주니 당연한 얘기다. 까미노를 마음속에 오래 담아 두었듯, 훌쩍 떠나왔다 할지라도 사전에 준비 운동을 했더라면 좀 더 수월했을까. 충동은 후회하지 않지만 안일함은 반성하고 싶다.

요즘엔 꼬박꼬박 성당이나 교회를 들리며 무사 완주를 마음 속으로 빌곤 한다. (c)밀린 일기



곤자르에서 출발해 모처럼 맑은 날씨를 만끽하며 걸었다. 도착지가 이틀 앞으로 다가와 이제는 좀 경주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앞서 걷는 북아일랜드인 제리 부부를 또 만났다. 제리가 먼저 까미노에서 걷기 시작해 일정을 맞춰 아내가 따라왔다고 했다. 멜리데에 도착하면 뽈뽀(갈리시아의 전통 문어 요리)를 먹겠다며 신이 난 나와 귀여운 문어는 그냥 두라고 외치는 제리는 즐겁게 티격대격 댔다. 쾌활한 두 사람은 추위도 안 타는지 가벼운 옷차림으로 저만치 멀어져 갔다.

아일랜드 사람은 아침에 와인은 절대 불가라고 한다. 와인보다 맥주를 물처럼 마시던 제리. (c)밀린 일기



문득 들린 카페에 메뉴가 진국이다. 집에서 엄마가 해주던 프렌치토스트 같은 걸 팔고 있었다. 우유에 계란을 풀어 설탕을 솔솔 처서 먹던 바로 그 맛이다. 언덕배기에 있는 카페는 숨을 헐떡이며 넘어오는 순례자들을 고소한 냄새로 불러 모았다. 매일 빵을 굽다 보니 요령껏 준비한 요리도 소진하고 맛있게 먹을 방법도 찾은 것 같았다.

가득 쌓인 스페인식 토스트. 보아디야는 스페인식 바게트란다. 이름이야 무엇이건 척 봐도 맛이 느껴지는 훌륭한 아침식사다. (c)밀린 일기



갈리시아 지방은 바다를 끼고 있어 해산물을 비롯해 특징적인 음식이 유명하다. 카스티야-레온 경계를 지나서부터 요한나와 가장 고대하던 뽈뽀를 드디어 먹으러 간다. 멜리데 입구부터 가득한 뽈뻬리아 Poulperia를 찾아갔다. 스페인어 어미 ria는 어떤 가게를 뜻하는 말인데 익히고 나니 응용이 쉬웠다. Cafeteria, Pizzaria, Panaderia. 그러니 뽈뻬리아는 뽈뽀 전문점 정도 되겠다. 한국으로 치자면 문어숙회 같은 요리인데 올리브유에 파프리카 파우더만 솔솔 뿌린 그 간단한 요리에 화이트 와인은 찰떡궁합이었다. 쫄깃하고도 부드러운 그 맛이 자꾸 생각난다.

낮고 닳은 동그런 나무 스툴이 거대한 홀을 가득 채웠다. 식당 한켠에는 종일 끓어대는 솥이 여럿이다. 포실포실하게 익힌 감자와 파프리카 구이를 곁들이니 별미였다. (c)밀린 일기



멜리데에서 미국인 친구들을 다시 만났다. 존과 벤, 트레이시 모녀였다. 가게에서 필요한 물건을 사고 나오는 길에 마주쳤는데 존이 생각보다 반가워해줘서 덩달아 신이 났다. 시간 나면 카드 게임하러 놀러 오라고 하기에 숙소에 들렀다 나가보면 어떨까 말을 꺼내던 참이었다. 요한나는 미국인들 특유의 겉으로만 친절하지만 속마음을 알 수 없는 surface reaction이 느껴진다며 우리끼리 쉬자고 했다. 내 입장에서는 둘 다 서양인이지만 유럽인이 미국인을 바라보는 시각이 우리와도 비슷할 때가 있다고 느꼈다.

매거진의 이전글 (#094) 2018. 10. 1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