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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린 일기 Dec 08. 2020

(#096) 2018. 10. 14.

Santa Irene 30.2km

곤자르를 출발해 이제는 산티아고씩 한 뼘마다 가까워진다. 아직 도시 외곽이지만 금세 잘 닦인 도로에 닿을 것이다. 시간의 흐름도 더 조밀하게 느껴진다. 까미노를 걷기 시작하던 언젠가 여긴 어디, 나는 누구, 왜라는 질문에 맴돌던 때를 생각하면 시간은 분명히 상대적이다. 걸음마다 맺었던 인연의 이름과 얼굴이 떠오른다. 한 달을 꼬박 걸으며 만나면 인사하고 가치와 삶에 대해 이야기하며 충만했던 시간들이 아련하다.


독일인 요한나는 스페인어를 꽤 잘한다. 영어도 무척 잘하고 프랑스어도 할 줄 알아서 만나는 사람마다 국적에 상관없이 인사말을 건넸다. 할 줄 아는 언어가 늘면 세상을 읽는 도구가 하나 늘은 것과 같다는 말을 아주 톡톡히 배운다. 그 어떤 때보다 외국어에 대한 열망이 가득 차올랐다. 유럽인의 특혜일 수 있겠지만 일단 시작하면 더디긴 해도 그런 게 대수겠는가. 따위의 상상을 하며 걷다가 제시카와 야라를 만났다. 스페인 비고에서 같은 직장에 다니는 명랑한 아가씨들은 짧지만 강렬한 휴가를 보내고 싶어 산티아고를 걷는 중이란다.

사람들과 함께하는 충동은 언제나 기분이 좋다. 걷다가 발견한 기념품 가게에서 순례자 전용 우정 팔찌를 맞춰 찼다. (c)밀린 일기



제시카와 야라는 흥이 넘쳤다. 덕분에 스페인 노래도 많이 알게 되었다. 걷다 춤추다 노래 부르다, 지루할 틈이 없다. 산타 이레나에 도착할 즈음 재미있는 펍을 지났다. 이런 곳은 또 들리지 않으면 아쉽기에 잠시 멈췄다. 내내 가을볕이 따갑던 스페인 가을 날씨가 이제는 흐리고 비 오는 환절기로 접어들었지만 그런 것은 아랑곳하지 않은 저지레였다.

작정하고 순례자들을 이끄는 펍. 나중에 앞서 떠난 순례자 친구들과 재회하며 이집얘기를 했더니 다들 들렀다 왔다기에 가게 주인의 전략이 맞아 떨어졌다며 웃었다. (c)밀린 일기



Peregrina(여성 순례자)라는 크래프트 비어를 마시며 병에 방명록을 남겼다. 떡볶이집에서 친구들과 추억 삼아 남기던 짓궂은 쪽지 같았다. 나는 한국어로 제시카네는 스페인어로 요한나는 독일어로. 각자가 쓴 내용을 읽어 달라고 하곤 기념사진을 찍었다. 무엇이든 추억으로 남기길 좋아하는 맥주병 뚜껑을 기념품 삼아 챙겨뒀던 기억이 난다.


산타 이레나로 가는 도중 추로스 집에도 들렀다. 한바탕 맥주를 마시고 갈증을 채웠으니 배를 채울 차례였다. 부르고스에서 처음 맛본 뒤 스페인 최애 간식이 되었던 추로스. 스페인식은 갓 튀긴 추로스를 진한 초콜릿에 찍어 먹어야 진또배기다. 아, 추로스 집 이름은 Churreria라고 부른다.

점심 메뉴는 초콜릿을 곁들인 추로스와 모둠 치즈, 와인이었다. 결코 식사 같지 않았지만 모두 원하는 걸 얻고는 만족했다. (c)밀린 일기



산타 이레나에서 제시카와 야라는 조금  걷기로, 나와 요한나는 여기서 멈추기로 했다. 대중 없이 걷다 보니 몹시 늦어  침대가 있을까 조바심이 났다. 가게 하나 없는 작은 길목에 위치한 알베르게는 우리처럼 목적지를 정해두고  사람보다 흘러가는 대로 걷다가 거리 계산 틀린 이들이 머무는  같았다. 남은 것은 하루,  이상 얼마를 가야 하는지 계산하지 않아도 된다. 기분이 이상하다.

요한나는 자기 나이만큼 적힌 마일스톤을 찾으면 기념 촬영을 하고 싶어 했다. 산티아고가 지척이니 이제 거리는 소수점 아래 셋째 자리까지 측정된다. (c)밀린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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