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밀린 일기 Dec 09. 2020

(#097) 2018. 10. 15.

Santiago de Compostella 22.6km

일어나 보니 크리스마스 날인 걸 알았을 때 기분이 이럴까? 별들의 들판,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아침이 밝았다. 살면서 자의로 매일 꾸준히 하는 일이 몇 없었는데 그중 최고를 이렇게 새긴다. 도망가고 싶었던 마음은 어느새 저 멀리 사라졌다. 더디지만 매일 온몸으로 쌓아온 노력이 눈앞에 닥치니 기분이 얼떨떨하다. 한 발 한 발 기대와 설렘이 쌓인다.

우리는 우리가 속한 삶의 모습대로 살아간다는 말이 가슴에 남았다. 어떻게 살 것인가는 순전히 나의 몫이지만, 어쩔 수 없다며 포기하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c)밀린 일기



용서의 언덕과 철의 십자가를 지나면 마침내 기쁨의 언덕 Monte de gozo이 우리를 기다린다. 먼 옛날 이 언덕에 올라서면 순례자들은 저 멀리 아스라한 별 빛 아래 산티아고 대성당을 발견했다. 순례는 고난이었고 과거에는 도중에 사고를 당하거나 목숨을 잃기도 다반사였으니 언덕에 붙은 이름이 절로 수긍이 갔다. 물병 삼은 작은 호리병 하나와 힘겨운 몸을 의지할 지팡이, 비상용 신발과 여벌의 옷가지가 전부였을 과거의 순례자들. 그때는 종교적인 의미가 훨씬 강했겠지만 지금은 까미노의 마지막 구간, 영혼의 길을 걸으며 모두 마음을 다스린다.

기쁨의 언덕에 놓인 조형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친림한 뒤 순례자의 길은 더욱 더 붐비게 되었다고 한다. (c)밀린 일기



높은 언덕을 지나 외곽 도로를 타고 차츰 도시의 중심 산티아고 대성당을 향해 나아간다. 마지막 날은 여느 까미노에서의 날들이 그렇듯 한결같이 마법 같았다. 앞서 만났던 사람들을 차례로 조우했기 때문이다. 페리, 존, 사라, 트레이시, 로리, 존, 벤, 리카르도, 필립. 광장으로 향하는 길에서 모두를 만났다. 산티아고에서 그간 만났던 모든 이들을 만난다면 얼마나 반가울까 상상해본 적이 있다. 길에서 겪은 아픔과 고통을 알고 있고 각자의 사연도 알고 있는 우리는 모두들 까미노 친구였다. 난생처음 만난 사람들을 이토록 그리워할 줄이야.

도시에 들어가기 직전 담벼락에 쓰여있던 문구. 고지가 눈 앞인데 그 어느 때 보다도 고단한 몸은 발걸음을 늦춘다. (c)밀린 일기



산티아고에는 ‘유럽의 모든 길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향하는 순례길 위에 만들어졌다’라는 자랑스러운 문구가 있다. 실제로 대성당으로 향하는 길 위에 글귀가 여러 나라 말로 쓰여있다. 문화와 역사에 새겨진 자부심은 이루 말할 것도 없겠지만 오늘날까지도 전 세계 사람들이 찾는 걸 보면 내가 까미노를 마음속에 품은 순간부터 시작된 나의 길도 역시 이 곳으로 통하게 꼭 정해진 것 같았다.

성당으로 향하는 길과 길 위에 쓰여진 글. 산티아고 올드시티에 들어선 순간부터 이미 심장은 정신없이 뛰기 시작했다. (c)밀린 일기



도시를 들어올 때에는 요한나와 한바탕 춤을 추면서 걸었다. 전날 제시카와 야라의 기억이 흥을 돋웠다. 이들도 산티아고에 닿았을까 하고 고민하던 차에 대성당 앞에 도착했다.

한 달 넘게 매일 꼬박 걸었고, 매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여러 이야기를 들었으며 끝없는 위로와 격려를 받았다. 도착했다! 해냈다! 하는 기대감은 삽시간에 터져버린 눈물이 대신했다. 요한나 우리 도착했어! 하고 광장을 둘러보며 환호하다가 그만 눈물이 터져버렸다. 우리는 부둥켜안고 너 정말 잘했어, 우리 정말 수고했어 하며 격려해주었다. 어쩌다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 친구가 곁에 있어 지극히 행복했다. 광장에는 우리처럼 먹먹한 감동에 눈시울을 붉히는 순례자들이 여럿이었다. 광장에서 딱 마주친 리카르도와 셋이 얼싸안고 지금 이 순간을 마음껏 만끽하라고, 우리는 충분히 누릴만한 가치가 있다고 위로받았다. 아름답고 행복하고 아련하고 소중했다.

광장으로 들어서는 길. 날이 무척 흐렸지만 주변을 둘러싼 온기에 마음만은 참 따스했다. (c)밀린 일기
매거진의 이전글 (#096) 2018. 10. 14.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