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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유숙 Jun 12. 2020

엄마의 반전-제주 수라상

때 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한겨울 혹풍처럼 아빠의 지랄 맞은 분노가 집안을 냉기로 뒤덮으면 엄마는 악다구니 대신 조용히 부엌 식칼을 움켜쥐었다.


엄마만 아는 제주 수라상을 만들기 위해서!

 



푸른 바다가 넘실대는 제주도 함덕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생 때 서울로 상경한 엄마는 여행과 꽃을 좋아하는 멋쟁이 아가씨였다.  


낭만적인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 건 '욱 '하는 성질을 박력으로 가장한 남자에게 '훅' 넘어가 혼인 서약을 하고부터였는데,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남편의 행패를 '세월 지나면 나아지겠지.', '내가 더 잘하면 좋아질 거야!'라는 부질없는 희망으로 참고 살기를 10년!   


우리 3남매가 쪼르륵 9살, 7살, 6살이 되던 해, 엄마는 화병으로 드러누웠다. 이렇게 더는 못 살겠다면서...!


40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의 기억이 생생한데, 식음을 전폐한 엄마가 여러 날 방에서 나오질 않자 우리 3남매는 배가 너무너무 고팠다. 감히 엄마에게 밥 달라는 소리는 못하고 부엌을 샅샅이 뒤진 끝에 라면 1 봉지를 발견했는데, 가스불을 사용할 줄 모르던 때여서 생라면을 잘게 쪼갠 뒤 라면스프에 찍어먹었다.


'오도독 오도독' 소리와 함께 입 안에서 짭짤하게 부서지던 라면 맛은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는데, 엄마 눈에는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비참한 광경이었나 보다. 세 아이가 바닥에 떨어진 스프 가루까지 먹어보겠다고 손가락을 쪽쪽 빨고 있는 모습을 본 엄마는 충격에 잠시 서있다가 집을 나가버렸고 우리는 두려움에 떨었다.


'도망간 거야? 엄마가 우릴 버리고?'


괜한 걱정이 진짜 공포로 변할 때쯤, 엄마가 양 손 가득히 장바구니를 들고 돌아왔다. 그리고 바쁘게 요리를 시작했는데...


첫 번째 요리는 편식하는 큰 아들이 게 눈 감추듯 먹는 제주 은갈치 조림!


납작납작하게 썬 무와 양파를 냄비 바닥에 촘촘하게 깐 뒤 은빛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갈치 토막 5개를 조심스럽게 올려놓는다. 잠시 후, 갖은양념 옷을 입은 야들야들한 갈치 속살이 자글자글 소리를 내면서 짭조름하면서도 달짝지근하게 조려지면...


물엿 한 바퀴로  마무리를 한 뒤 통깨, 후추를 살살 뿌려서 접시에 담아낸다.

가출한 아들도 돌아오게 만든 밥도둑의 제왕 은갈치조림


다음은 큰 딸이 가장 좋아하는 전복 해물뚝배기!


평소에는 비싸서 살 엄두를 못 냈던 제주도 활전복을 보란 듯이 4개나 커다란 뚝배기에 넣는다. 그 위에 제철 맞은 각종 해물과 야채를 송송 썰어 올려 넣은 뒤 바글바글 끓어오르면 멸치가루를 섞은 된장과 고춧가루로 국물 맛을 낸다.


칼칼한 청양고추가 매운맛을 더하고 시원한 바다내음과 구수한 된장의 깊은 향기가 온 집안에 스며들면 전복 해물뚝배기도 완성!

첫맛은 얼큰한데 끝맛은 개운한 국물맛이 일품 중에 일품이다.


마지막은 막내딸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소고기 산적을 만들 차례!


길게 탁탁 토막 낸 소고기에 진간장, 다진 마늘, 파, 설탕, 매실액, 참기름을 아낌없이 부어 조물조물 촉촉하게 무치고,


갖은양념 냄새가 고소하게 진동하는 소고기에 나무꼬치를 꽂아 좌르륵 윤기 나는 시루떡 같은 산적을 만들고 나면...

이 상태로 1시간 이상 양념에 재워놔야 더욱 맛있다!

센 불에 달군 프라이팬에 소고기 산적을 앞뒤로 노릇노릇  2번 구워낸다. 육즙을 살포시 머금은 달달한 소고기 산적이 될 수 있도록!

한 가지 재료만 꽂는게 특징인 제주도식 소고기 산적

여기서 요리의 향연이 끝나는가 싶었는데, 이제 엄마가 좋아하는 음식이 남았다. 마당에서 무농약 재배로 곱게 기른 각종 쌈채소와 아삭하게 잘 익은 김장김치를 ‘턱’ 하니 포기째 냉면사발에 푸짐하게 담고 나면 보기만 해도 배부른 엄마표 진수성찬이 완성되었다.


생일도, 제삿날도 아닌데 이게 웬 횡재인가 싶어 우리 삼 남매는 굶주린 강아지들처럼 달려들어 맛나게 먹기 시작했고, 행여라도 가시가 목에 걸릴 까 엄마는 분주히 갈치 살을 발라주고 고기를 먹기 좋게 잘라주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가 미안해!
임금님 부럽지 않게 너희들 키우고 싶었는데....


엄마 마음대로 이름붙인 제주 수라상

그 날 이후부터 엄마는 사는 게 힘들어 만사가 다 귀찮을 때마다 오히려 더 악착같이 끼니를 챙겼고, 우리는 엄마의 사랑이 듬뿍 들어간 한식 밥상에 둘러앉아 고단한 하루의 스트레스를 나누고  든든하게 배를 채우면서 하루를 살아갈 힘을 얻고 내일을 버티고 불안한 미래를 준비하고 그랬다.

    



긴 세월의 끝자락을 향해서 가고 있는 지금!


엄마의 제주 수라상은 간절히 원해도 맛볼 수 없는 그리운 추억의 음식이 되어버렸지만...... 괜찮다.


엄마가 즐겨 드시던 한식 음식 곳곳에 엄마의 기억과 향기가 생생하게, 새록새록 배여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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