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에서 보내는 펜팔(5) - 덕복희의 입춘 편지
반가운 산달! 이번 편지는 자중해야겠어요. 웃기다는 말에 살짝 벅차오를 뻔했는데요. 신이 나 적당한 익살의 경계를 넘어버리는 것은 하수들의 흔한 실수죠. 저는 하수라서 긴장의 끈을 놓으면 안되겠습니다.
저는 몇 주 전에 본가에 다녀왔던 터라 설에는 구례를 지켰어요. 귀촌한 첫 해에도 설에 집에 안갔었는데요. 엄청 외롭더라고요. 시골은 명절만 되면 텅 비었던 마을 어귀의 주차장이 가득 차요. 집집이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고, 들리지 않던 아이들 웃음소리가 들려요. 손자들 놀러왔다고 맛있는 음식을 해주시는가봐요. 벚꽃시즌 다음으로 지리산이 붐비는 때일 거예요. 첫 해는 왁자지껄한 속에 저만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된 기분이었는데… 해가 쌓이니 꼭 그렇지만도 않아요.
시골인심이 좋다는데 정말이에요. 이번 설에는 이웃께서 나물과 부각을 잔뜩 챙겨주셨어요. 제가 채식하는 걸 알고 일부러 젓갈도 넣지 않으셨다면서요. 저희 집엔 냉장고도 없고 전 먹는 양도 적어서, 그 많은 반찬을 상하기 전에 해치우느라 복에 겨운 고생을 했답니다. 시골은 동지나 새해 같은 날엔 이웃끼리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는 가봐요. 저 같은 외지인에게도 꼭 한 솥씩 챙겨주시더라고요. 도시에서 나고 자란 제게는 매번 놀라운 경험이에요.
작은 방에서 혼자 일어나 외출했다가 다시 혼자 침대로 돌아온다는 산달을 그려보면서 꼭 예전의 제 모습이 겹쳐보였어요. 산달이 제 이웃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 많은 나물 반찬을 나눠먹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요. 동치미랑 김부각은 먹어본 중에 최고였어요. 산달, 대단한 걸 놓쳤다고요. 그렇지만 인심이 푸진 이웃 대신으로, 산달에게는 사랑과 기다림을 허락한 가족들이 곁을 지켜주었나봐요. 오랜 반려자들과 따뜻한 시간을 보냈다니 다행한 마음입니다.
산달! 이번 입춘의 주제는 ‘나의 전투복’이에요. 회동을 앞두고 서로를 상상해볼 수 있도록 정하긴 했는데요. 저한테 그닥 이득이 있는 주제인지 모르겠어요. 썩 근사한 전투복은 아니거든요. 저는 계절별로 단벌인 펑퍼짐한 절복을 입고 지내요. 겨울을 제외하곤 나머지 계절은 머리에 터번을 두르곤 해요. 색은 온통 파란색입니다. 지독한 컨셉을 가진 듯 보이지만 사실 누구보다 실용성을 중시해요. 절복은 밭일과 환경운동, 어느 때고 편안한 옷이에요. 색이 통일 돼 있어 모든 옷을 돌려입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어요. 외출 준비가 양치질보다 빨리 끝나는 기적의 실용성!
특별한 전투복이라기엔, 딱히 골랐다고 볼 수 없는 단벌이지만… 좀 웃긴 얘기를 해보자면 본의 아니게 이게 환경운동에 먹히더라고요(?) 기자회견 같은 곳에 가면 꼭 기자들이 저를 가운데 세우려고 하세요. 외관이 독특하니까 기사사진으로 쓰기 좋다나 봐요. 그들의 전문용어로 말하자면 “그림이 된다”는 거죠. 뭐랄까… 약간 꼬질꼬질해서 사연이 있어보이고, 시골에서 보기 드문 젊은이에, 방금 밭일을 하다 나온 듯한 현장감… 이게 그림이란 걸까요? 덥수룩한 수염에 떡진 머리를 풀어헤치고 다니는 친구가 한 명 있는데, 그도 저와 같은 신세에요. 사진 찍을 때 어리둥절한 채로 나란히 세워지곤 합니다.
아마 회동에서도 더 멋진 옷을 고르는 덴 실패하고 똑같은 옷을 입을 텐데요. 기자회견 사진처럼 떫은 감을 먹은 표정이진 않을 거예요. 산달의 편지를 읽을 때처럼 활짝 웃고 있을 거예요. 제게도 산달의 편지는 기쁨이거든요. 산달은 한 문단마다 한 번씩은 꼭 저를 번뜩 놀래는 문장을 숨겨놔요. 싣지 못한 산달우드향이 코끝에 덥썩 매달린대도 그 문장들만큼 이목을 끌지 못할 지도 몰라요. 저는 그 문장들 앞에선 일순 눈이 휘둥그레졌다가 다음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서성거려요. 그래서 두번째 산달의 편지는 꼭 여명의 숲길 같았어요.
집 뒤편에 바로 이어진 지리산둘레길이 있어요. 매일 아침, 사물의 푸르스름한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하면 재빨리 집을 나서요. 해가 다 뜨도록 게으름을 피우면 놓치는 것들이 많아요. 숲속은 동틀 무렵이 가장 분주하거든요. 아침 산책을 하며 다람쥐를, 붉은배새매를, 운이 좋으면 담비를 만나고 친구들에게 자랑하는 게 제 낙이랍니다. 요즘은 나무 공부에 푹 빠졌어요. 나무의 수피와 겨울눈을 요리조리 살피다 도감에서 본 나무가 딱 등장하면 그때의 환희란! 그 나무를 지나칠 때마다 덩실덩실 손을 맞잡고 아는 체하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에요.
그런데도 숲길은 여전히 수수께끼에요. 저는 새들의 ‘송’과 ‘콜’을 구분하지도, 바위 위에 놓인 불그스레한 똥이 누구의 똥인지, 진흙에 찍힌 멧돼지 발자국이 어디로 향했는지 알 수가 없어요. 알고 싶은 것들 투성인데 다 알 수 없어 숲을 떠나지 못해요. 한동안 서서, 바람의 방향이나 나뭇잎이 흩어진 모양새를 골똘히 노려만 보다가 돌아온답니다. 그 수수께끼의 숲을 지나고 나면 아침 해가 다 차올라있어요. 알쏭달쏭한 공간을 헤매고 제게 남는 건 놀랍게도 고단함보단 아름다움이에요. 신비이고 눈부심이에요.
저는 궁금해요. 산달은 어느 누군가를 닮고 싶어 어떤 색으로 물들어있는지, 갸우뚱한 표정과 미지근한 미소를 짓고서도 어떻게 사랑에 대해선 거침없이 말할 수 있는지, 자신을 감당하기만도 벅찼던 지난 날들은 어땠는지. 저는 산달에게 꼬치꼬치 캐묻지 못해, 수수께끼 같은 문장들 앞에 주춤거리는 발자국을 남기는 걸로 대신해요. 온통 동글동글한 그 문장들의 잔상을 바라보는 걸로 만족하기로 해요. 산달의 편지가 제게 남긴 것 역시 아름다움이에요. 산달의 전부를 알지 못해도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이 있어요. 신비와 눈부심이 있어요.
산달의 사진을 보고 신기했어요. 어디인지 모를 그 숲이 제가 늘 걷는 숲과 꼭 닮았거든요. 저도 모르게 마치 산책하는 것처럼, 그 사진 속 어린 나무의 겨울눈과 낙엽 틈에 있을지 모를 고라니 똥을 찾고 있더라고요. 산달이 가까이 있는 것처럼 느껴져요. 먼 곳에서도 비슷한 풍경들을 눈에 담고 있잖아요. 산달이 작은 방에서 혼자라고 느낄 때면, 저라면 이 사진을 건네겠어요. 산달이 이 사진을 찍으려 시선을 낮출 때부터, 아마 사진 속의 존재들이 산달을 따라왔을 거예요. 생강나무꽃 색의 햇살자국이 작은 방까지 비춰주지 않나요?
그럼 이만 산달, 입춘대길입니다!
p.s. 새벽마다 시 한 편 읽으면서 하루를 시작해요. 타로카드를 뽑듯이 설레는 마음으로 시집의 아무 쪽이나 펼치거든요. 오늘은 달복의 예쁜 노랫말이면 충분하겠어요. 다음에 선율을 들을 행운이 오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