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이어린 Apr 29. 2023

봄을 전해준 복희에게

지리산에서 보내는 펜팔(6) - 산달의 입춘 편지

어느덧 입춘이군요! 복희의 편지가 제게 봄처럼 도착했어요. 많이 기뻤답니다. 복희가 올해에는 제게 봄의 전령처럼 봄의 소식을 전해주었으니까요. 저뿐 아니라 도시에 사는 많은 사람들은 봄이 올 때 풍기는 향긋한 내음과 걸음 소리를 놓친 채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봄 속에 들어와 있을테니까요. 아, 얼마나 안타까운 일일까요? 저는 얼마나 많은 손짓들을 놓쳐왔던 걸까요?


현대인들이 무릇 그렇듯, 살아가기 위해서 도시 사람들은 너무 많은 정보들을 끌어 안고 살고 있어요. 매일 새로운 이야기들을 접하면서도 어제 들은 이야기들을 내려놓지 않아요. 아니, 그건 이야기가 아니라 그저 환상 덩어리일 뿐이에요. 사람을 마비시키는 환상 덩어리. 그것들 때문에 우리는 만성적인 신경과민에 시달려요. 저만 해도 덜렁거리지 않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해야만 했는걸요. 매일을 메모장에 기록하고 계획하고 신문을 읽고 새로 나온 책은 뭐가 있는지 살펴보고 저기 높으신 분들 사이에서 무슨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내키지 않지만) 지켜봐야 하고,, 놓치지 않는 정보들이 없는지 늘 긴장하게 돼요.


매일을 자극적인 음식들을 먹다보면 혀가 얼얼해지듯, 귀에 전자 음악을 늘 꽂고 살면 점점 귀가 들리지 않듯, 도시는 사람들을 무뎌지게 만들어요. 오직 어떤 의미인지도 모를 숫자들과 시곗바늘들과 정신없는 글자들이 어떤 의미인지 파악할 수 있게끔 훈련되죠. 어떤 감각들을 잃어버렸는지도 알지 못하고 저는 오늘도 버스에 탑니다. 지리산을 넘어가는 동백처럼 붉은 태양이 어떤 시를 만들어낼지 우리는 알 수 없어요.


도시라고 부를 수 없는 곳이 존재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하다가 복희의 편지를 받았어요. 창문을 대뜸 넘어와 피아노 위에 자리잡은 생강나무꽃 색의 햇살자국을 전해 준 복희를 읽다 보니 지리산이 제가 더듬어보던 그런 곳일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다 지리산에 사는 것을 바라는 것은 아니니 조심하셔야 해요. 다만 생명이 사는 모든 곳이 그리 아름답고 연약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지리산 숲길의 숨을, 그 생경한 시들을 편지에 한아름 담아줘서 진심으로 고마웠어요. 저는 이번 주 내내 무엇을 담아 보낼지 고민하다가 봄소식을 늦게 전해버리고 말았네요. 미안함을 전합니다. 그런데 복희가 김부각을 혼자 다 먹었으니 조금 덜 미안해하도록 할게요.


저는 명절을 끝내고 다시 본가로 돌아왔어요. 제가 살고 있는 곳, 화순은 참 걷기 좋은 곳이에요. 집을 나서서 천변을 따라 쭈욱 내려가다 보면 마른 갈대가 우거진 습지가 있어요. 그곳에서는 늘 오리들이 떼를 지어 유유히 물장구를 치고 있기도 하고 큰 백로가 기지개를 펴고 날아가는 것을 볼 수도 있어요. 어제는 잿빛 두루미를 만나 얼마나 기뻤는데요. 다시 발걸음을 돌려 집을 지나치면 무등산자락으로 들어갈 수 있어요.


우리 전라도의 산들은 침엽수와 활엽수가 함께 살고 있어 충청도나 강원도의 외로운 산들보다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대요. 따뜻한 기운과 차가운 기운이 만나는 곳이라고들 하더라구요. 그 사실을 알고 나니 저의 하늘을 따스하게 덮어주던 나무들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어요. 전에는 함경도에 있는 나무나 제주도에 있는 나무나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여러 조건들이 만나 이곳에서만 살 수 있는 나무님들을 내가 보고 있다는 생각에 저는 참 감사했어요. 복희가 만나는 새벽녘의 나무들은 어떤 분들일지 문득 궁금해져요. 지리산에 가게 된다면, 제게도 그 분들을 소개시켜 주세요. 복희에게도 제가 만난 나무님들을 소개시켜 줄게요. 함께 나무 앞에서 환희를 나누는 날을 상상해봐요.


복희, 적당한 익살의 경계를 넘어버리는 것이 하수들의 실수라면서요. 복희가 덥수룩한 수염의 소유자와 함께 절복을 입고 기사 사진을 찍는 모습을 상상하게 만들다니요. 조금 더 긴장의 끈을 붙들어 매어야 되겠어요 복희. 아니, 근사하지 않다니요! 그만큼 근사한 전투복이 어디있나요? 절복과 터번을 걸치고 환경운동을 하다니. 제게도 남는 절복이 있다면 하나만 나눠 줄 수 있나요? 부탁하고 싶을 정도로 탐이 나요.


휴, 도시에서 기후운동을 한다는 것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답니다. 동물들이 저마다의 보호색으로 자신의 몸을 주변 환경에 맞추듯, 도시생활자들 또한 마찬가지거든요. 다만 자신 주변의 색을 닮아 물들어가는 것이 섭리인 두꺼비와 달리 도시에 사는 존재들은 때를 묻히지 않기 위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거리 어딜 가나 서로 나서 자신이 아름답다 우기는 옷들이 돌아다녀요. 가련한 사람들은 그것들을 너도나도 가지지 못해 안달이고요. 아마 복희도 모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리스 신화에서는 헤라클레스가 독 묻은 옷을 입고는 고통스러워 불에 뛰어 들죠. 수천 년이 지난 오늘에서는 사람들이 피부가 두꺼워져서 독을 입고서도 끄떡없는 존재가 된 것만 같아요. 아, 산으로 강으로 바다로 독을 흘려보내는 방법을 기어코 터득한 걸까요?


흠흠 샛길로 잠깐 샜던 것 같습니다. 제가 어떤 옷을 입었는지 궁금하신가요? 그렇다면 알려드릴겠습니다. 겨울의 저는 늘 무릎부터 목까지 올라오는 검은색 코트를 입고 다닙니다. 도시인처럼 보이기 딱 좋은 옷이죠. 하지만 그 속에는 기후운동을 하는 사람다운 옷을 입고 있답니다. 많은 옷을 가지고 있찌 않아 갈색 바지와 청바지를 돌려 입구요. 몸통은 찻빛이나 하늘빛을 담은 니트를 주로 두른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건 양말이에요. 꽃이 수놓아진 양말을 입고 지하철을 탈 때면, 어느 때보다도 신난 상태로 기후악당들을 무찌르러 출동하는 기후운동가로 변신하곤 합니다. 그게 왜 기후운동을 하는 사람다운 복장인지 의문이 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답은 간단하답니다. 그런 옷을 입은 제가 기후운동을 하기 때문이에요 후후.


사실 어떤 옷을 입느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은 저마다의 맥락 속에서 자신의 전투복들을 선택하니까요. 옷뿐만일까요? 우리는 각자가 가진 욕망이 허락되는 만큼 자신의 관계 방식을 만들어내요. 맨날 검은색 옷만 입는 사람도 파란색 옷만 입는 사람도, 말을 하다가 말고 숨어버리는 사람도 몸짓 발짓 다 해가며 온 맘 가득 표현하는 사람도, 다 저마다의 살아가는 방식이죠. 그건 선택과 의지의 영역이라기보다는 주어지거나 휩쓸리기 쉬운 종류의 것인 것 같아요. 사랑조차도요. 운명이란 말의 존재 가치가 분명히 있답니다.


그래서 중요한 건 저 사람이 왜 저런 옷을 입고 다니는지 이해하고 소통하려고 노력하는 것 같아요. “너가 삶을 사랑하는 방식은 이렇고, 내가 사랑하는 방식은 이런데, 우리가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 우리는 함께 삶을 나누며 살아갈 수 있을까?” 이런 물음 말이에요. 거기서부터 창조적인 것이 시작된다고 믿어요.


저도 궁금해요. 복희는 언제부터 절복을 입게 되었는지, 도시에서 나고 자랐음에도 왜 지리산에서 살기로 결심했는지, 나무 공부는 복희에게 어떤 즐거움을 가져다 주는지. 아침에 지리산 둘레길에 들어서면 어떤 숨들이 복희의 몸을 그렇게 벅차게 만드는지. 복희를 읽어가는 것은 참 편안하고 기분좋은 일이에요. 곧 있을 복희와의 만남을 상상해요. 이럴 것이다 쉽게 그려지기도 하고, 어떤 이야기들이 또 오고 갈 지 잘 떠오르지 않기도 해요. 그치만 우리가 이렇게 서로를 향한 질문을 품고 있으니, 턱끝까지 벅차오를 시간이 되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아요.


내일 복희가 매일 걷는 숲에서 만나게 될 새로운 영혼은 누구일까요? 새롭게 꺼내 읽을 시는 누구의 말들일까요? 그동안 또 어떤 숨들을 모아 보내올까요? 저는 그 무한한 마음을 새롭게 받아 안으며 기다릴게요. 봄이에요. 함께하는 봄이네요. 안녕.


여전히 궁금함이 많은 산달 올림


p.s. 메리 올리버의 ‘마침 거기 서 있다가’라는 시를 아나요? 내일 아침에는 이 시를 읽으면 어때요?. “해바라기는 눈부시게 빛나. 어쩌면 그게 그들의 방식이겠지. 어쩌면 고양이는 곤히 잠드는지도. 아닐 수도 있고.”

작가의 이전글 기꺼이 이웃이 되어주고픈 산달에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