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력과 정성으로도 채울 수 없는 것
설날을 맞아 할머니 댁에 다녀왔다. 연갈색 소파며 비취색 도자기며 익숙한 물건들이 할머니를 대신해 손녀딸을 반겼다.
청소로 분주한 엄마, 아빠를 따라다니며 할머니 공간을 살폈다. 할머니가 병원에 가신 후로도 그 아들은 매일같이 엄마 집에 출근 도장을 찍은 모양이었다. 먼지 한 톨 없는 선반과 식탁, 햇볕 아래 널려있는 카펫, 가지런히 정리된 쿠션이 주인 없는 공간에서 일어난 그간의 일을 말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집주인의 부재는 어떻게든 티가 날 수밖에 없었다. 안방 달력은 한 달 전에 멈춰 있었고, 행거엔 철 지난 패딩 점퍼가, 거실엔 멈춰버린 벽시계가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빠! 시계 약 다 됐어요." 나의 외침에 아빠는 새 건전지를 가져왔다.
건전지를 갈아 끼우는 아빠의 손길이 슬퍼 보인 건 기분 탓이었을까. '빈 집처럼 안 보이려고 신경 썼는데 놓친 게 있었네' 하는 쓸쓸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할머니 아들이 서글픈 표정으로 빈 집 문을 열고 들어가는 일이 어서 끝났으면 좋겠다. 액자 속 웃고 있는 할머니 대신 "아이고, 이게 누고. 언제 내려왔노." 하는 진짜 할머니 목소리가 손녀딸을 반겨주면 좋겠다. 할머니 공간이 하루빨리 예전의 모습을 되찾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