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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일 Aug 20. 2019

내 주변에는 없다. 세상 어딘가에는 있다.

관심사에 대해 깊이 나눌 대화 상대

 나이를 먹어가면서 느끼는 어떤 자연스러운 사실들이 있다. 흔히 공감대라고 이야기하는 것들이다. 공개 코미디 프로그램의 어떤 출연자가 무대 위를 돌아다니고 있다 해보자. A그룹에 갔더니 맛있는 △△에 대한 열띤 대화를 하고 있다. 따분함을 느끼고 B그룹으로 이동하자 멋있는 □□에 대한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C그룹에 갔더니 특정 ○○에 대한 이야기만 하고 있다. 주인공은 계속 A, B, C 그룹을 돌아다니며 대화에 껴보지만 실은 별로 중요한 이야기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방황한다.


 적다 보니 따분한 구성의 무대인 것 같다. 공개 코미디 무대로 비유한 이유는 각각의 개인이 겪었을 비슷하지만 다른 경험을 익숙한 포맷으로 표현해보고, 공감할 수 있도록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위의 예시를 보면서 ‘맞아. 나도 그런 적 있는데’ 하는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언제부턴가 내가 속한 여러 그룹별로 매번 비슷한 범주의 대화가 반복되고,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누기 힘들어지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가까운 지인에게 이야기했더니 본인도 비슷하단다. 나이를 먹어가며 느끼는 사실들. 사람의 몸은 노화하면서 자기 일과 생각의 세계에 더 깊이 뿌리내리기 때문일까? 어쩌면 내가 피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목적이 있는 업무적인 대화가 아닌 사적인 대화에서, 이런저런 모임이든, 친하든 거리감이 있든 대화의 주제가 매우 겉돈다는 느낌을 받는다. 각자 주목하고 있는 관심사에 대해 깊이 궁금해하거나, 건설적인 계획을 이야기하기보다는, 서로 자기 이야기하는데 시간이 부족해 보였다. 그것을 들여다보면 식탐이나 피곤함 같은 욕구 드러내기. 허세가 섞인 자기 자랑, 의미를 감춘 명령, 사회적 사건이나 현상에 대한 의견과 강요 등 생각의 교류를 위한 목적이 아닌 시시콜콜한 것들이다. 조금 강하게 썼지만 결국 의도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의미 없는 정보의 반복과도 같은 대화가 덕지덕지 붙어있다. 먹고사는 것이 각박해져서 그런 것일까? 생각을 들춰내는 것이 민망해서? 무엇을 얻어낼 목적이 없다면 얘기하고 싶지 않아서? 그룹이든 개인이든 다르지 않았다.


 내가 좀 과민반응을 보이는 것일 수도 있다. 가만 보면 그런 대화라도 싫은 건 아니다. 여전히 여러 그룹의 사람을 만나고, 대화하고, 친밀한 관계를 이어가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만남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올 때면, 진짜 내가 나누고 싶은 이야기를 할 사람은 주변에 없다는 것을 더욱 강하게 느낀다는 것이 문제였다. 문득, 내가 가상의 사람과 어떤 주제를 가지고 마음껏 대화할 수 있다면, 나는 과연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지 궁금해졌다. 나는 어떤 생각과 호기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인가? 내 관심사는 무엇인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만약 당신이 경제적, 시간적 제약 없이 오로지 자신의 순수한 호기심 충족만을 위해서 학교에 갈 수 있다면 어떤 과목을 선택하겠는가? 내 행동을 곱씹어본 이야기다. 언젠가 국내 영상대학원들의 커리큘럼을 찾아 비교해보면서, 가고 싶은 석사 과정과 연구해보고 싶은 논문 주제 등에 대해서 상상해본 적이 있었다. 지금 당장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지만 생각해볼 자유는 있으니까. 돌이켜보니 그것이 내 안에 감춰진 관심사이자 순수한 호기심의 영역이었다. 만약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스스로의 관심사에 대해 잘 모르겠다면 내 방법을 따라 해 보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당신은 어떤 것에 순수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가?


 나는 시각적인 원리. 그러니까 사람들이 회화, 사진, 영상물 등을 보고 어떻게 특수한 감정을 느끼는지에 대해 궁금함을 느낀다. 한겨울에 반팔 옷을 입은 광고 모델 사진을 봤을 때 느끼는 아이러니함. 색깔마다 주어진 상징과 해석이 학습에 의한 것인지 본능에 의한 것인지. 영상에서 느껴지는 리듬감은 오디오에 의해 강조되는 경우가 많은데 소리가 제거된 순수 영상만으로는 그 효과가 덜한 이유는 무엇인지. 이런 것 따위가 궁금해질 때가 있다.


최근 직접 촬영한 계곡 사진


사진에서 느껴지는 개인적인 느낌을 간략하게 나타내본 그림 1, 2


 어렸을 때는 무심결에 사진을 찍었다면, 이제는 뭔가 이미지의 뼈대나 근본 같은 것을 생각하면서 찍거나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방송 촬영을 계속 해오면서 어떤 습관이 생겼다고 해야 할까? 이미지의 느낌을 드러내는 가장 본질적인 요소는 무엇일까. 사진을 토대로 내가 느낀 구성적인 느낌을 간략하게 포토샵으로 그려보았다. 나이를 먹으면서 보이지 않던 것들을 보게 되는 시각을 가지게 됐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어딘가에 있을까?


 나는 사진과 미술 전시를 보러 다니는 것을 좋아하고, 그 외에도 우주에 대해 상상한 영화를 좋아한다.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순수 과학, 사회과학 같은 것들과 인문학)에 대해서도 궁금하다. 나이를 먹어가며 나 자신에 대한 궁금증도 많아졌고, 개신교 성도로서 영적인 성장에 대한 관심도 있다. 인간관계가 어려운 이유를 내 행동과 말에 담긴 의미를 타자화 하면서 발견하는 일도 잦아졌다. 나는 여전히 호기심만 많을 뿐 식견과 통찰력은 좁다. 지금 이야기한 것들은 그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말일뿐, 내가 이런 것들을 깊이 통달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래서 더 이런 주제의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간절한지도 모르겠다.


 결론은 이런 내 관심사를 가지고 대화할 사람이 내 주변에 없다는 것이다. 어떤 멘토를 만나서 정답 같은 이야기만 듣고 싶은 게 아니다. 같은 분야와 시대를 살면서도 다르게 바라볼 수도 있는 다양한 시각을 나누고 싶다는 얘기다. 내가 소심해서 이런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꺼내지 않은 이유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겠지만, 여러 만남의 상황을 떠올려 보아도 이런 개인적인 이야기를 듣고 진지하게 반응해줄 사람이 선뜻 떠오르지 않는다. 용기를 발휘해 꺼내 놓았던 적도 몇 번 있었으나 장님 둘이서 코끼리 다리를 만지는 것과 비슷한 상황일 뿐이었다. 지식과 통찰력에 가치를 두고 성장하고 있는 고독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비슷한 과정을 겪는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런 맥락의 ‘초심자’로서 부러운 사람들이 있다. 1900년대 초반의 프랑스 파리에 모인 화가, 사진가, 무용가 등 여러 예술가들은, 매일 저녁마다 술집에서 각자의 견해를 교류했다고 한다. 한국의 문인들도 각 지역의 다방에 모여 각자의 철학을 나눴다고 한다. 비교적 최근, 현대미술관에서 관람했던 E.A.T(Experiments in Art and Technology)라는 전시에서 1960년대 공학기술자와 예술가들의 융합 전시, 공연을 보며 멋지다고 생각했다. TED 강연에 흔쾌히 입장료를 내고 의견을 교류하는 사람들도 부러웠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분들은 복 받은 인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 속에 숨어있는 어쭙잖은 예술가 때문에 답답함을 느끼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여전히 그저 ‘관심사’만 있는 사람일 뿐이며, 그런 자리에 지금 가더라도 할 말이 없는 사람일 뿐이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일 뿐이었다. 내가 나를 초심자라고 이야기한 것은 이것 때문이다.


 이 답답함을 어디에서 해결할 수 있을까? 언제부턴가 이런 고민을 하며 지냈는데, 최근에 그런 갈증이 조금 해소되고 있는 것 같아 이 글을 쓰게 되었다. 그것은 독서를 통해서 가능했다.


 나는 읽을 책을 고르는 데 있어서 무심결에 눈에 띈 제목이나 내용, 작가의 책을 메모해 두었다가 몰아서 사곤 한다. 그런 책은 어렸을 때는 소설 위주였지만 점차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쓴 인문학 책으로 바뀌었다. 나는 그런 연구와 생각이 깊이 담긴 책들을 읽으면서 대화 상대가 없다는 갈증이 조금은 해소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평소에 어렴풋이 생각했거나 믿고 있는 인생의 작은 깨달음들이 있는데, 책을 읽다 보면 그것에 대한 확신과 확장, 깊이 있는 연구와 시도를 했던 사람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아. 세상에 이런 생각과 기분을 가진 사람이 나뿐이 아니었구나’ 하면서 안도감을 느낀다. 내 주변엔 없지만 세상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나와 비슷한 감정과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다.


 아래는 내가 좋아하는 바실리 칸딘스키의 ‘구성 8’이라는 작품이다.


Vasily Kandinsky 'Composition 8' (July 1923)


 칸딘스키의 그림은 난해해서 그것이 무슨 의도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강렬한 끌림이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대학교 강당 구석에 세워져 있었는데 뒤집혀 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뜨거운 추상이라고 불리는 칸딘스키의 그림은 현실을 재현하거나 조합하여 감동을 주는 방식의 일반적인 회화와 확연히 다르다. 칸딘스키는 내면과 정신 같은 무형의 것(감동)을 ‘점, 선, 면’으로 구성된 이미지 나열을 통해 표출하고 다시 그 감동을 감상자에게 전달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기하학적인 요소들은 서로 힘을 주고받는다. 그는 대상의 흔적이 남아 있는 ‘인상’에서 출발해, 내면을 드러내는 ‘즉흥’, 느낌을 완전한 추상으로 표현하는 ‘구성’이라는 방식으로 표현 기법을 발전, 성숙 시켰다. 다른 유명한 추상화가인 몬드리안은 차가운 추상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같은 추상의 범주에 있지만 수평의 안정감, 수직의 생동감, 축약된 원색 등을 통해서 현실의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하나 둘 지우고 가장 본질적인 것만을 남기는 표현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추상의 범주에 있지만 칸딘스키와는 전혀 다른 표현 방식이다.


 나는 몬드리안 보다는 칸딘스키의 작업에 더욱 매력을 느낀다. 그의 작업은 굉장히 고차원적인 표현 방법이라서 표현하기도 해석하기도 어렵다. 나는 방송 영상을 제작했던 PD이면서 이런 표현 방식에 늘 관심이 있다. 먹고사는 문제가 아니라면 영상에 대한 탐구로 뛰어들고 싶은 이유가 내 본연의 관심사에 있다.


“… 내 손에 펜이 들려있지 않았다면, 어쩌면 나는 춤을 췄을까요? 시를 읊었을까요? 결국, 지금의 나는 이렇게 그림을 그리며 쏟아냈지만요.”
“그렇게 따지면….”

 이건 마치 커다란 솥에 담긴 다양한 재료들을 각양각색 모양의 그릇에 담는 작업과도 같다. 정성스럽게 담기보다는 그냥 그릇째로 슬쩍 냄비 안에 집어넣어서 부욱 떠버리는 느낌일 뿐. 내가 아무리 설명해도 B는 결국 별것 아닌 것에 의미부여를 참 많이도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피곤하다고.


 위 글은 내가 20대 때 썼던 짧은 창작글의 마지막 부분이다. ‘무의식을 꺼내는 작업’이라는 제목의 글이었는데 무슨 계기 때문에 썼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칸딘스키를 알기 전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나중에 바우하우스와 칸딘스키에 대해 알게 되었고 관련된 책을 읽으면서 칸딘스키가 느끼고 표현하고자 했던 그 무형의 감정과 추상 표현 방식에 큰 감명을 받았다. 칸딘스키의 책을 요즘도 읽고 있는데, 시대를 초월해서 대화를 나눈다는 이야기는 이런 맥락인 셈이다. 좋아하는 향기에 몸이 이끌리듯이, 나도 잘 모르고 지내던 내 관심사가 나에게 꼭 필요한 책이자 대화 상대에게로 인도해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제목이나 내용, 저자의 이름을 보고 기록해두었다가 사게 된 책들은 신기하게도 이전에 읽었던 책이나 언젠가 했던 내 생각과 깊이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 과학, 수학, 미술, 심리학이 서로 다른 것 같아도 순수한 목적으로 깊이 탐구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여다보면 세상을 보는 공통된 시각이 담겨 있다. 사람들이 어떤 매력을 느끼면서 독서를 지속하는지 알 수 없으나 나의 경우에는 그런 것들을 발견하는 즐거움으로 책을 놓지 않고 있다. (사실 독서량이 그리 많은 편은 아니지만)


 최근 읽었던 책들을 보면 정신분석과 심리상담, 수학자와 물리학자가 쓴 인문학, 뉴미디어와 미디어 리터러시에 대한 연구와 방송 윤리, 아젠다 세팅 같은 사회과학 이론 등 주제는 거창하지만 결국 다 사람 사는 세계에 대한 여러 시각이 담긴 이야기들이었다. 학자뿐만 아니라 평생 한 분야에서 일한 장인 또는 일반인의 생각은 비슷한 면이 있다. 축적된 연구 결과이든 직업의 전문적인 노하우든 그것은 그 사람이 세상을 보는 고유의 안경이 되고, 각자의 방법으로 해석한 세상은 겉으로 보기엔 다른 것 같아도 결국 모두 연결되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는 세상의 근본을 이해해보려는 호기심과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각자의 분야에서 다른 시각으로 발현되고, 공통점으로 엮이는 일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


 가끔 책의 초반 몇 장을 넘기면서 내 지식의 부족함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하지만 책 속에서 제시하는 세상을 해석하는 새로운 시각이 너무 신기하고 재밌어서 빠져들게 된다. 책 속의 화자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대화 상대라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들기도 한다.


 지난 6월 1일 방영된 ‘대화의 희열 2(KBS2)’에서는 모델이자 방송인으로 활동 중인 한혜진 씨가 출연했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키가 크고 마른 체형 때문에 놀림을 받곤 했는데, 그것보다 더 문제가 됐던 것은 남과 다르다는 사실에서 오는 위축이었다. 고민 많던 사춘기 소녀는 선생님의 추천으로 모델이라는 낯선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되었고 처음으로 가본 모델 대회장에서 자신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남과 다른 신체에 주눅 들어있던 그녀는 모델 지망생 사이에서 아무도 자신을 유별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올랐고, 이곳이 자기가 있을 곳이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새로운 집단에서 그녀는 평범하고 자연스러운 사람이 되었다. 나는 그 방송을 보면서 ‘나와 비슷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란 한혜진 씨가 모델의 세계에서 느낀 그런 기분이 드는 사람들이 아닐까 생각했다.


 지구에는 현재 약 77억 명의 사람이 살고 있다 한다. 그러니까 77억 명의 사람들이 비슷한 듯 서로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책으로 생각을 기록해두고 떠난 이들도 많으니, 그 이상의 개인적 가치관이 지구 상에 존재한다. 그 속에 나와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은 과연 얼마나 될까? 꽤 많지 않을까? 내 주변엔 없지만 어딘가에 분명 있을 대화의 상대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는 조금은 엉뚱한 생각이다. 그것이 나와 내 생각, 일에 대한 확신을 준다면 조금은 괜찮은 것 아닐까?



BGM♪ M83 ‘Do It, Try It’

ⓒ창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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