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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일 Sep 19. 2020

J의 새벽 연락

‘학창 시절 J는 참 똑똑했다.’ 그건 아마 내 기억 속에서 좀 더 부풀려졌는지도 모른다. 벌써 많은 시간이 지났고, 그때의 나도 지금 같지 않았으니까. 성적이 상위권이었다 그런 게 아니다. 뭔가 하는 행동이 시원하고 유쾌했던 기억이 남아있다. 이름 석 자를 들으니까 안개 물기처럼 남아있던 분위기가 떠오른다.


‘똑 부러졌었지. 아마?’ 그런 그녀가 내 앞에서 자기 인생을 한탄하고 있다. 나는 이런 기대를 하고 나온 게 아니었는데. 아무튼, 이런 그녀의 모습도 뭔가 신선하게 다가왔다. 막연하게 더 대단하고 멋진 사람이 됐을 거라 생각했나 보다. 집을 나서는 동안 내가 망상을 했나? 어찌 됐든 ‘낯선’이라기엔 가깝고, ‘지인’이라고 하기엔 타인에 가까운 친구를 그렇게 만났다. 느닷없이. 그리고 의외의 모습으로.


얘기를 듣고 행색을 보니, 나를 만나기 전에 이미 조금 취한 상태였다. 그녀는 한 잔 들이켜고는 “책임과 맹세를 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고 화난 듯 눌러 말했다. 그러고는 확고하게 자기 인생관을 수정했다면서 나에게 가르치듯 말했다. ‘얘는 그동안 이런 대화 나눌 사람이 없었나?’라고 생각했다. 왜 이런 개인적인 이야기를 십수 년 만에 만난 나에게 털어놓고 있는 걸까? 대화 상대야 누구라도 됐으면 그만 이었던 건가? 새벽에 울리는 연락은 다 거절당한 뒤에 할 수 없이 하는 거라던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약간 설레어서 나왔다. 그런 내 모습이 바보 같아서 후회가 들던 참이었다.



“뭐 하고 있었어?”


“어? 그냥 영화 보고 있었어.”


“무슨 영화?”


“해리포터?”


“뭐야? 여전히 소년 같은 이미지 그런 건가? 어릴 때 다 봤던 영화 아니야?”


“그냥 오늘 틀었던 게 그거였을 뿐이야. 그냥 새벽에 이런저런 옛날 영화들 틀어놓고 딴짓하고 그러는 거지 뭐. 봤던 영화니까. 라디오처럼.”


“불면증이라도 있나 봐?”



새벽 빈속에 마신 술 몇 잔에 머리가 핑 돌았다. 새벽인데 춥지 않냐는 둥 일상적인 이야기로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자기 얘기를 한참 하다 이제 내가 궁금해졌나 싶었다. 그때쯤 푹 삶아져 속살만 손질되어 나온 참소라 한 접시와 초장이 나왔다. 올라오는 김을 맡으니, J와 함께 다녔던 학교 근처에 수산시장이 있었던 기억났다. 무슨 말을 할까 얘기만 듣고 있다가 떠오르는 공통의 추억을 짚어가며 시간을 때웠다. 그녀도 내 말에 이런저런 맞장구를 쳐주면서 관심 있는 척했다. 서로 분위기 띄워보려고 이어가는 대화라는 걸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런 어색함이 있었다. 그러다 내가 그녀의 근황을 묻자, 기다렸다는 듯 신세 한탄하는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뭐 이렇게 될 거라는 거 모르는 것도 아니었고, 나는 흥미로운 남 인생이나 들어보자는 마음으로 귀를 기울였다.



“누가 그렇게 무책임하게 너한테 행동한 건데?”


“그냥, 모든 사람들이... 너 빼고.”


“나는 남이나 마찬가지 아니냐? 사람은 아무 책임도 져주지 않잖아. 약속도 다 이뤄지기 전까진 모르는 일이고. 무슨 일이 있었는데?”


“너도 같은 부류인가? 그냥 공감해줄 줄 알았던 건 내 착각?”


“내가 무슨 로봇이냐 무작정 고개만 끄덕여주게.”


“그래 맞아. 옛날 영화 달달 외고 있을 사람한테 내가 할 말은 아니지. 그래서 영화는 재밌어?”


“글쎄, 그냥 향수 같은 거지. 배우들 어렸을 때 모습 보면서 그냥 옛날 생각이나 느낌 같은 거 드는 게 좋더라고. 영화마다 그런 분위기 같은 게 있어서 좋아. 며칠 동안 그렇게 라디오처럼 틀어놓으면 꿈도 좀 달라지더라고.”


“재밌게 사네.”


“글쎄. 네가 말한 배신 같은 건 영화에 없으니까. 이미 아는 영화는 놀라울 것도 없잖아?”


“그래. 사람들만 매번 새로운 배신을 하지. 근데 그 영화 마지막에 어떻게 됐지? 기억이 안 나네.”


“엄마의 사랑? 희생? 덕분에 주인공이 어부지리로 악당을 물리치고 학교 생활이 끝났다?”


“그랬나? 엄마의 사랑. 희생이라….”


“영화처럼은 아니지만, 부모의 책임감은 보편적인 거잖아.”


“갑자기 우울해지네? 내가 영화 속 주인공보다 더 불쌍한 것 같아서.”



바보 같은 대화가 이어졌다. 나는 그녀에게 나에게 왜 연락해서 나오라고 했는지 묻지 않았다. 그녀도 내가 왜 선뜻 나와줬는지 묻지 않았다. 그냥 계속 만나왔던 것처럼 익숙한 척 딱딱하게 식은 소라 조각을 집어먹었다. 시간이 좀 지나자 그녀는 좀 더 취했고, 나도 술김에 그랬는지 앓는 소리 듣는 것에 까칠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뭐 오늘은 내가 네 얘기 다 들어줄 것만 같아서 부른 거야? 그냥 생판 모르는 남을 만나지 그랬어?”


“잘 들어주다가 갑자기? 미안하게.”


“나도 뭐 새벽에 오는 연락들 다 그렇다는 거 알지만 막상 나와서 듣다 보니까 좀 그래서. 너도 나이 먹어서 알겠지만 남 인생 얘기 들어주는 게 쉬운 일이냐고. 안물안궁이라고.”


“와우. 너 원래 이렇게 솔직한 타입이었냐? 그래. 나는 내 얘기 어느 정도 했으니까 너 얘기나 들어보자.”


“됐어. 뭐 그게 그거지 너랑 다를 게 뭐가 있겠냐?”


“아니지 다르지, 재밌는 얘기 없어? 나 디스 해봐. 더 미안해지게.”


“그러면…. 내가 뭐 물어볼 테니까 생각하고 대답해봐.”


“뭐야 퀴즈야?”


“퀴즈는 아니고 심리테스트? 어디서 봤던 건데. 음. 커다란 검은 바탕에 하얀 구멍이 있는데, 그 속에 뭐가 보여? 대답해봐”


“글쎄 뭐가 보일까…. 손이 보이는데? 아주 늙고 마르고 시커먼 손. 힘없이 축 늘어진 손. 죽은 것처럼.”


“그럼 죽지는 않았단 얘기네? 그래서 그 손을 잡을 거야?”


“아니, 별로 그러고 싶진 않은데? 누군지 알고 싶지도 않다.”


“보통 궁금해하지 않나?”


“누군지 알 것 같아서 싫어.”


“누군데?”


“엄마. 근데 왜 이런 거 물어본 거야? 무슨 심리테스트야?”


“그냥 어떤 이미지 같은걸 떠올리게 만드는 질문을 하면 가장 신경 쓰이는 거라든가, 중요한데 놓치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알 수 있다고 하거든. 그래서 한 번 얘기해봤어. 화제 전환도 좀 해볼 겸. 근데 어머니 손은 왜 그런 거야? 실제로 어디 아프신 건 아니지?”


“아. 내가 애들한테 연락 안 해서 몰랐을 거야. 어머니 몇 년 전에 돌아가셨거든. 근데 마지막에 되게 아프다가 돌아가셨어. 이것저것 치료받았는데, 거의 숨만 붙어서 사셨지. 살아있는 뼈다귀였어. 그땐 나도 정신없어서 잘 몰랐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까 충격을 크게 받은 그런 거였나 봐. 네가 갑자기 물어보니까 생각나네.”


“미안. 몰랐네.”


“엄마가 원래 손이 예쁜 분이었거든. 내색은 안 했지만 엄마가 내 머리 땋아줄 때나, 뭐 먹으라고 집어줄 때…. 아!”


“왜?”


“갑자기 생각난다. 진짜 까맣게 잊고 있었네. 네가 영화 얘기해서 그런가? 갑자기 생각났어. 그 왜 공사장 지나가다 보면 빨갛고 반짝거리는 경고등 같은 거 있잖아? 아니다. 형사들 자동차 위에 달아놓고 반짝거리는 거.”


“응”


“내가 엄마한테 그걸 갖고 싶다고 생떼를 썼던 적이 있거든? 아주 어렸을 때 말이야. 무슨 만화영화를 보다 그랬는지 어쨌는지. 아무튼 엄마가 그걸 어디서 구할 데가 없으니까 집에서 만들어본다고 재료 구해서 그냥 비슷하게 만들어준 적이 있거든.”


“대단하시네.”


“엄마가 빈 유리병 속에 전구를 넣은 거였는데, 크리스마스 전구 중에 제일 크고 깜박거리는 걸 넣은 거야. 근데 그 전구를 켜놓으니까 열이 생각보다 많이 나더라고. 얼마 안 가서 깨져버렸지. 그때 엄마 손이 크게 다쳤어.”


“헐. 불은 안 난거지?”


“응. 불까지 나진 않았는데, 곧장 병원 가서 꿰매고, 화상치료 받고 그러셨어. 나는 옆에서 미안하다고 계속 울고불고 그랬는데, 생각해보니까 지금까지 죄책감 같은 게 남아있었나 보다. 와…. 이거 정말 새까맣게 잊고 있었어.”


“어렸을 때 일이니까 까먹고 살지. 근데 지금까지 왜 죄책감을 가져. 어렸을 때고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아 그렇지. 아무튼 지금 생각하니까 그때 엄마보다 내가 더 나이 먹었기도 하고, 지금 나는 애가 없어서 그 감정 잘 모르겠지만, 나라도 당연히 아이 탓을 하진 않았겠지. 애가 무슨 잘못이 있겠어. 근데 어린 나는 미안하다고 진짜 내가 나쁜 애라고 계속 시달렸던 거 같아. 그 뭐더라….”


“뭐?”


“그 있잖아. 아 크리스마스. 그때 되면 막 애들 선물 달라고 조르고 그랬는데, 나는 내가 나쁜 애니까 산타 할아버지가 나한테 선물 주시면 안 된다고 잘못했다고 편지 쓰고 그랬어. 나중에 커서 아르바이트하고 처음 받은 월급으로 엄마 장갑 사드린 것도 기억난다. 와…. 진짜 나 죄책감 엄청 갖고 살았었네. 무심결에 한 행동 같은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무슨 퍼즐 맞추듯이 이유가 맞춰진다. 와 씨. 이 생각하니까 갑자기 울컥한데?”


“착하네. 어머니도 다 알고 계시지 않겠냐?”


“그래. 엄마도 다 알고 있었겠지. 자기 자식이 그렇게 미안해하는데 어떻게 뭐라고 하겠어.”



내가 J로부터 듣게 되리라 예상했던 건, 남자 친구와의 이별이라든가 직장 상사와의 불화 같은 거였다. 하지만, 전혀 의외의 이야기를 듣게 됐다. 만약 내가 새벽에 옛날 영화를 보다 나온 게 아니었더라면 어땠을까? 그냥 응큼한 생각 가지고 나와서 어떻게 한 번 해보려고 했던 거였다면? J가 세상 사람에게 배신감을 느낀 이유는 어쩌면 어렸을 때부터 씻어내지 못했던 엄마에 대한 죄책감의 응어리 때문은 아니었을까? 나는 갚아가며 살고 있는데 어째서 당신들은…. 창밖은 벌써 밝아지기 시작했다. 곧 헤어져야 할 낯선 지인 J가 갑자기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내가 그녀였다면 이렇게 새벽에 누군가에게 전화해서 나오라고 할 수 있었을까? 할까 말까 고민만 하는 나 보다 확실히 단호하고 똑 부러진 모습이 여전한 것 같다. 내 느낌이라는 퍼즐에 J를 맞추고 있나?



“뭐야. 내 얘기 듣고 있어?”


“어? 어. 듣고 있잖아. 그래서? 어머니께서 무책임하게 뭐 하셨다고?”


“엄마가 뭘 무책임해. 딴생각하고 있었냐?”




BGM♪ DAUL ‘In Touch (Feat. Charli Taf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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