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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일 Feb 20. 2023

아름다움, 왜

그림 같은 집에서 살고 싶다.


아름다운 것에 대한 인간의 욕망이 있다. 누군가 그랬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는 그 모습이 ‘아름다웠노라’ 했다고. 맞는 말이다. 늘 생각한다. 동물들은 기능적인 이유를 위해 몸을 치장하거나 둥지를 꾸미곤 하지만, 인간처럼 물건을 정렬한다든지 청소를 한다든지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인간의 것은 의미 없는 집착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것이 정점에 이른 것이 미술과 패션인 것 같다. 건축과 공예 등 모든 것에 미학이 따르지만 나는 그것들이 유독 가깝다 생각한다. 외형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집착을 넘어 소리에 대한 아름다움을 찾는 탐구 정신도 깃들어있어서 많은 음악이 비슷한 맥락으로 탄생하고, 사람들에게 위로를 준다 생각한다.


인간은 밥만 먹고 기계처럼 효율만 따지면서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랬다면 예술 장르가 벌써 쇠퇴했어야 한다. 이과와 문과가 양립하면서 더 나은 사회로 발전하고 위로와 영감을 주며 상호작용한다. 인간은 아름다운 것에 대한 욕망이 있다.


동물은 어째서 이런 욕망을 가지지 않았을까? 그렇기 때문에 아름다움을 향한 집착은 인간 고유의 표상이 될 수 있었던 걸까? 구애를 위해 아름답게 치장하는 수컷들도 있지만, 인간의 시각일 뿐이라 생각한다. 여러 수컷 중 하나의 돋보이는 존재가 되기 위한 몸부림의 결과가 아니었을까? 어째서 동물은 수치심이 없고 생존과 번식 욕구에만 목을 매고 있는 것일까. 인간의 유전자는 어떤 돌연변이로써 우연히 발생했으며 그것이 이렇게 진화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너무 신기하다. 그 기간과 우연의 확률로 따진다면 그것은 너무 낮은 확률로써 필연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우연이 계속되어 확신이 들 정도가 되면 그것은 필연, 숙명이다.


인간의 아름다움에 대한 집착은 미학이라는 학술 장르까지 만들었다. 나는 그것에 대해 잘 모른다. 단지 아름다움이라는 인간에 대한 근원적 욕망에 대한 이유와 배경에 대한 연구를 하는 학문으로만 알고 있다.


올림픽 공원에 갔을 때였다. 공원에는 이제 막 가로수 정비를 마친 듯, 키 큰 플라타너스 나무들이 네모반듯하게 이발되어 있었다. 어째서 자연스럽게 자랄 나무를 저렇게 네모 반듯한 육면체로 잘랐을까. 부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정렬된 나무의 모습은 보기에 아름다웠다. 넓은 뿌리부터 수직으로 상승하며 얇아지는 원기둥. 그 위에 얹어진 초록 잎사귀들의 정육면체 집합. 건축적으로 길을 따라 배치된 리드미컬한 반복 배치. 바람이 불며 나뭇잎이 흔들릴 때 보이는 정육면체의 붕괴와 결합의 움직임. 거기에 더해 나무 몸통과 나뭇잎의 다채로운 색. 해질 녘 노을 속에서 달라지는 분위기. 물과 땅, 하늘과의 융화. 이런 요소들이 다양한 변수 속에서 어울리는 결과로 도출된 것이다.


언젠가 인천 자유공원에 올라 멀리 인천항 갑문을 내려다본 적이 있었다. 그동안 여러 산에 올라 자연의 풍경을 보며 아름답다 여겼지만, 거대한 인공 구조물과 떠다니는 선박들의 여유로운 느낌을 보며 웅장함을 넘어 아름답다고 느꼈다. 기계적인 장치들이었지만 인간이 흘린 땀의 결과였고 거대한 청사진의 현실화된 버전이었으며, 그것이 힘차게 돌아가고 있었다. 일련의 과정도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요소일까? 미학은 이것을 포함하는 것일까?


군대에서는 왜 침구와 의류를 굳이 90도 각을 만들어 접어서 정리하는 것일까. 흐트러짐 없는 것이 군 사기 진작에 보탬이 될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시각적인 깔끔함이 흐트러짐 보다 좀 더 정성 있어 보이고 노력한 느낌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환경이 흐트러져 있으면 인간은 마음에 영향을 받는다.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하면서 무언가 정리하고 나아갈 힘을 받는다는 사람들의 인터뷰를 보기도 한다. 인간은 정리‘병’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 미학은 말로 표현되지 않는 행위로써 노력과 감정 표현을 대신하는 일종의 언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창일


게슈탈트 법칙이라는 게 있다. 인간이 형태를 인지하는 과정을 정리한 내용이다. 이 이론을 읽고 약간 가려운 데가 긁혀진 기분이 들었다. 이 법칙을 읽고 왠지 더 인간은 정말 동물과 차별화된 점을 장착했다고 생각했는데. 인간은 어떤 시각적 요소들을 볼 때 그것을 단순화 한 도형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런데 그냥 떠올리는 차원을 넘어서 현실에 결여된 부분을 메꾸어 완전한 형태로 상상하는 능력이 있다. 가령 ㄱ(기억) 자로 배치된 세 개의 점을 보면 그것을 삼각형, 혹은 결여된 사각형으로 상상할 수 있다. 좀 더 확장해서 구름을 보고 동물이나 캐릭터로 상상하기도 하고, 밤의 어스름한 그림자를 보며 귀신으로 여기고 놀라기도 한다. 인간은 그런 상상력을 가졌다. 무한한 상상과 우연의 결과를 탄생시키는 기묘한 능력이다. 인터넷이 사라지면 별자리 이야기가 다시 유행할지도 모른다.


동물 얘기가 나와서 잠시 다른 이야기를 적는다. 동물과 인간의 다른 점을 꽤 오랜시간 생각해 보곤 했다. 내 기준에서 이해한 내용은 이렇다. 인간은 어떤 개념적인 사고를 할 수 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닌 추상적 ‘개념’에 대해서 머릿속으로 그려보고 그것을 구체화할 수 있다. 그 개념들은 어떤 추상적 덩어리에서 한 단어로 압축되는 정제의 정리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그런 내용들이 학습되고 발전(익숙해짐)하면서 실체가 없는 개념을 가지고도 머릿속에서 서로 충돌시키거나 사고 실험을 하는 단계까지 가능해지는 것이다. 동물들은 이런 개념의 충돌을 머릿속에서 구체화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직까지 내 수준에서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고 여겨진다. 동물과 인간의 다른 점을 여러 가지로 예를 들 수 있겠지만, 나는 개념적 사고의 자유로운 활용이 동물과 인간을 구분짓는 가장 큰 차별 점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런 측면에서 미학과 결합해 보면 인간은 ‘개념’으로써 어떤 자연의 산물(우리가 시각적으로 보는 모든 것)의 형태적 추상화(압축) 과정을 해낼 수 있고, 그것을 역순으로 단순화한 것에서 현실적인 모습을 유추하는 상상의 풀어냄 과정을 해낼 수 있다. 언어의 과정이든 기타 다른 예술의 장르이든 비슷한 과정을 거칠 수 있다. 때로는 이것을 더 연구해서 보이지 않는 감정 같은 것들을 형태와 리듬적 요소의 시각적 결과물로 생산해내기도 한다. 이것은 더 높은 차원의 시각적 개념 놀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보통은 이렇게 까지 하지는 않지만, 인간 내면에는 그것에 대한 본능적인 인지 요소가 들어있는 것이다.


공포를 주제로 만들어진 비디오 게임에서는 기괴한 괴물들을 많이 볼 수 있는데, 흥미로운 미학적 실험들이 가득하다. 예를 들면 손가락이 수십 개 달린 괴물이 있다. 이것을 우리가 볼 때 징그럽다고 여기는 것은 인간의 손가락이 다섯 개씩 두 쌍 달리 것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결국 미학은 익숙함에서 출발한다. 익숙함은 학습이다. 학습은 반복이다. 상징적인 요소들 역시 특정 문화권에서 익숙한 것들에서 출발한다. 인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조금 더 공통적인 요소들이 발견된다. 보편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와 익숙함은 일종의 바탕이 된다. 그런 기괴한 요소들을 비틀어 만들어 낼 수 있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이것에 숙달된 예술가는 기괴한 것들을 신비하고 아름답게 디자인할 수 있다. 그런 요소를 능숙하게 다룰 줄 아는 사람은 스스로 설명할 수 없다 하더라도 내면에서 많은 메커니즘이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설명할 수 없다고 그것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할 수 없다. 언어의 영역은 추상의 구체화 기호화 작업인 일종의 기계화 과정이며 우리는 머릿속에서 언어가 아닌 개념으로 생각하고 신체로 표현하기도 한다.


내가 전문적으로 뭔가를 설명하고자 이런 글을 적는 것은 아니다. 내가 특별한 수업을 들은 것도 아니고, 그저 내 마음속에서 ‘나는 왜 이런 시각적인 요소에 대한 관심을 가졌는가?’에 대한 궁금증을 가질 뿐이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경험한 많은 것들. 직업으로 삼아온 영상에 대한 경험들이 이런 시각적 요소와 인간의 관계에 대한 뗄 수 없는 이유들에 대한 탐구심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저 얕은 시각으로 몇 권의 책을 읽고 문득 생각해 본 것들이지만 분명 인간의 마음속은 미학적 탐구심으로 가득하다고 생각한다.


효율로만 따지자면 의미 없을 것 같은 인간의 예술 활동이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임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것이 없는 인생을 생각할 수 없다. 인간은 늘 아름다움을 탐구하고 욕망한다. 단순히 무엇이 아름답고 아름답지 않은지 정의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기호일 뿐이다. 시간이 흘러야만 알 수 있는 클래식들이 있다. 인간의 본질을 꿰뚫은 아름다움은 시간이 흘러서야 필터링되어 명작으로 인정받고 빛난다. 지금 여기저기 예술이라며 스스로 일컫는 많은 것들은 시간이 조금 지나면 바로 어제의 습한 날씨처럼 잊혀질 것이다. 살아남아 시대를 관통하는 몇 가지는 본질을 꿰뚫은 아름다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BGM. Hello Meteor 'Rushing Green'

ⓒ창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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