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근노근 Aug 17. 2021

우리는 왜 먹어야만 살 수 있을까

공장식 축산을 넘어서

  우리는 왜 먹어야만 살 수 있을까. 나는 그것이 무척이나 불편하다. 먹어야 한다는 건, 곧 다른 생명을 먹어야 한다는 것이고, 그것은 곧, 다른 생명을 죽여야만 한다는 것이다. 다른 생명을 죽여야만 살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우리는. 다른 동물들을 포함하여, 우리는 왜 이 모양 이 꼴로 태어났을까.


  공장식 축산만이 문제는 아니다. 물론 공장식 축산은 큰 문제다. ‘고기’를 더 싸게 먹기 위해 우리는 동물을 공장의 물건처럼 취급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치맥을 위해 A4 반 크기의 철망에서 날개 한번 제대로 펼치지 못한 채 필요 이상의 닭들이 죽어나가고 있다. 더럽고 비좁은 공간에서 비위생적으로 살다가 항생제 범벅이 되어 날갯짓이라도 한번 할라 치면, 어느새 전염병에 걸려 살처분의 운명을 맡게 된다. 웃기는 건, 살처분이란 게 사실 뭐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라는 거다. 공장에 갇힌 동물의 입장에선 살처분으로 죽나, 치킨이 되기 위해 죽나, 죽기는 매한가지이기 때문이다. 생명에 대한 존엄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시스템을 만들어, 죽음을 무감각하게 만들어 버린 공장식 축산에 대한 문제제기는 분명 필요하고 온당하다.


  하지만 우리는 먹어야 한다. 공장식 축산을 비판하더라도 우리가 먹어야 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먹어야 한다는 당위를 부정할 사람은 많지 않다. 사자가 얼룩말을 먹듯, 우리도 먹어야 한다. 다만, 우리는 지금 필요 이상의 고기를 먹고 있으니 조금 줄이자는 것이다. 이렇게 많은 고기의 범람이 사실 자연스러운 건 아니다. 인간의 역사에서 이렇게 많은 고기를 먹었던 때가 또 언제란 말인가. 현대의 인류가 자연 본성의 동물들과 다른 점은, 너무 많이 먹는다는 것. (못 먹어서 여전히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은 조금 다른 관점이므로 잠시 제외하기로 하자.) 흔히 드는 예가, 사자는, 배가 고프지 않을 때는, 얼룩말이 옆에 있어도 전혀 건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은 배고파도 먹고 배가 안 고파도 먹는다. 필요 이상으로 많은 고기를 생산하여 필요 이상으로 먹는다. 그리하여 너무 먹지 않는 걸 전제로 하여, 공장식 축산의 대안으로, 동물들의 습성을 자연스럽게 펼칠 수 있는 형태의 ‘동물복지형 농장’을 들 수 있을 것이다. A4 절반의 사육장이 아니라 횟대가 있는 넓은 풀밭에서,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그런 농장 말이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먹어야 한다. 그 사실은 다시 한번 말하지만, 변함이 없다. 먹어야 살 수 있다. 배고프지 않을 때는 얼룩말이 옆에 있어도 거들떠도 안 본다는 그 사자를 보며 많은 깨달음을 얻기도 했다. 인간의 육심은 끝이 없다는, 비록 뻔하디 뻔한 생각일지라도, 반성이 되기도 했다. 인간의 세계와 동물의 세계는 다르며, 자연의 본성에 충실한 동물의 세계가 훨씬 더 낫구나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자연은 잔혹하고 냉정하다. 때로 맹목적으로 신성시하기도 하는, 그래서 그 거대함에 경외감까지 들기도 하는 이 ‘자연’이라는 것이, 왜 이렇게 잔혹한 방식으로 설계되었는지, 그 어느 조물주의 장난인지 모르겠으나, 한탄스럽기만 하다. 자연의 잔혹함이 인간의 잔혹함보다 더하다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니다. 인간은 자연의 최악의 발명물이다. 인간보다 더 잔혹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자연이 잔혹하지 않다는 건 아니다. 자연은 그 압도적인 거대함과 웅장함으로 잔인함과 잔혹함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려 체감적으로 덜 잔혹하다고 느낄 뿐이다. 호랑이가 노루를 잡아먹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할 이 누가 있을까. 이 거대한 생태계의 유지를 위해 그들, 육식동물들의 잔인함은 그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어쩔 수 없으니까. 그게 삶이고 인생이니까.


  하지만 우리는 너무나 쉽게 잡혀먹는 노루의 입장을, 토끼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이 날카로운 송곳니에 물려 살이 갈기갈기 찢기고 너덜너덜해져도, 그저 어쩔 수 없는 거라고 모두 다 체념해 버린다. 자연의 섭리가 그런 거니까. 그런데 그 고통, 상상이나 해봤나. 아직 숨이 붙어있는데, 살점이 계속해서 찢겨나가고, 내장이 뜯겨나가고, 뼈가 다 드러나도록 찢기고 찢기는 그 고통을. 그 실존에 처해있는, 그 동물의 그 고통을 그렇게 쉽게 생각하는 게 정말 맞는 걸까. 자연의 섭리니까 당연하다고 그냥 덮어버리는 게 온당키나 한가.


  그래서 나온 것이 아마 채식일 것이다. 식물은, 동물과 같은 감각기관이 없기에, 그런 고통과 아픔을 느낄 수 없다는 가정을 전제로 채식은 평화롭게 이루어진다. 일단 충분히 존중할 수 있는 의견이다. 식물의 아픔과 고통까지 생각하기엔 너무 먼 영역의 길을 건너가야 한다. 인간은 그나마, 채식으로도 살 수 있다. 인간은, (절대 그럴 일이 없을 테지만) 고기를 먹지 않고도 살 수 있으니 가능하다. 그러나, 그러지 못하는 존재들이 있다. 육식동물들은, 다른 동물들을 잡아먹어야만 살아갈 수 있다. 채식을 했다가는, 종 자체의 존립이 위태로워진다. 다시 돌아와서 하는 얘기지만, 아픔과 고통을 느끼는 다른 생명을 먹어야만, 죽여야만 살아가야 하는 동물들이 있다. 그들은 대체 어떡하느냔 말이다.


  그러니깐 나는, 이 위대한 자연이, 결국, 잘못 설계되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자연은, 우주는, 조물주는, 글러먹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