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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근노근 Nov 25. 2022

내 맘대로 서양철학사- 소피스트

궤변론자 소피스트

  돈만 밝히는, 정의(正義) 따위는 관심도 없는, 궤변론자 소피스트. 우리에게 소피스트의 이미지는 그러했다.


  첫 번째 소피스트, 트라시마코스. 그가 “정의는 강자의 이익을 의미”한다고 했을 때, 나는 현실을 풍자하는 말인 줄 알았다. 어차피 힘센 자들이 다 해 처먹는 이 더러운 세상, 정의는 땅에 떨어졌고 ‘정의’라는 낱말 따위는 그저 강자들을 위한 것일 뿐. 민중에게 정의니 뭐니 떠들어도 아무 소용이 없는 그런 현실을 반영한 자조적인 말인 줄 알았다. 그런데 트라시마코스의 저 말이 처음 나온 플라톤의 <국가>에서 그가 소크라테스와 대화한 걸 보니 그게 아니었다. 트라시마코스는 그냥 정말 저렇게 생각하고 있는 거였다. 강한 자들이 하는 말이 곧 법이고 올바름의 기준이라는 것.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 싶었다. 소크라테스가 차분히 논리적으로 정의가 왜 강자의 이익이 아닌지를 설명하고, 결국에는 트라시마코스도 수긍하는 모습을 보며 ‘역시 소크라테스!’를 외쳤다. 


  두 번째 소피스트, 프로타고라스. 우리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소피스트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말로 유명하다. 이 말을 들었을 때 이게 무슨 말인가 했다. 이렇게 인간 이기주의의 끝을 달릴 수가 있나. 인간이 말하고 생각하는 것이 결국 법이고 척도니, 다른 동물이나 자연은 정복해도 되고 파괴해도 되는 것 아닌가! 위에 얘기한 트라시마코스의 말과 다를 바 없다 생각했다. 결국 자연의 강자인 인간의 이익이 곧 정의라는 말처럼 들렸다. 그런데 조금 공부해 보니 저 말속의 ‘인간’은 ‘보편으로서의 인간’이 아니었다. ‘개별 인간’을 말하는 것이었다. 즉, 한 사람 한 사람의 말과 행동이 모두 다 그 나름의 진리요, 기준이 될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문제는 생긴다. 각자의 행동이 모두 다 진리라면, 어떤 이가 다른 이의 물건을 훔쳐도, 다른 이를 때려도, 스토킹을 해도 다 괜찮은 것인가? 이렇게 이기적인 철학이 어디 있는가?


  세 번째 소피스트, 고르기아스. 그의 말은 ‘절대적 회의론’으로 불린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첫째로, 이 세계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로, 존재한다 해도 알 수 없다. 셋째로, 안다고 하여도 다른 이에게 전할 수 없다.” 

  뭔 소리인가 싶지만 조금 풀어서 써 보자면 이렇다. 첫째에서 이야기한 ‘이 세계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우리 앞에 놓인 것들을 넘어서는 절대적이고 본질적인 어떤 실체(마치 플라톤의 ‘이데아’ 같은)는 없을 거라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종교에서 말하는 어떤 신과 같은 존재일 수도 있겠고, 자연철학자들이 말하는 원질(arche)일 수도 있겠다. 눈앞에 보이는 것 이상의 진리, 본질은 없다! 그러나 둘째, 설사 그런 진리와 본질이 있다고 하여도 우리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관찰과 경험에 의존하는 매우 불완전한 존재이므로. 불완전한 감각으로 신과 같은 영원불변한 존재를 우리는 도저히 알 수 없다. 셋째로, 안다고 하여도 역시 우리는 불완전한 존재이므로 다른 이에게 전할 수 없다. 아무리 완벽하게 설명하려고 해도 우리의 언어는 한계가 있다. 내 의도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받아들이는 이는 이 세상에 없다. 모두 자기가 느끼고 경험한 만큼, 내가 알고 있는 것과 연관해서만 받아들이고 판단한다. 


  평소 가끔 심각한 ‘회의주의’에 빠지기도 하는 나는 고르기아스의 이 ‘회의주의’가 마음에 들었다. 주춤했다. 그들은 과연 궤변론자가 맞을까.     


소피스트를 위한 변명

  고르기아스를 마주한 후에는 소피스트에 대한 생각을 바꿔보기로 했다. 여태껏 내가 듣고 배워 온 위와 같은 ‘궤변론자 소피스트’에 대해 다르게 생각해 보기로 했다.


  먼저 프로타고라스.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말에서 풍기는 냄새는 상당히 거만하지만, 그것은 번역의 문제일 수도 있겠다. 여하튼 그 뜻이 꼭 개별 인간의 끝 간 데 없는 이기주의로 ‘해석’되어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프로타고라스는, 내가 모든 것의 척도이니 다른 이가 싫어하든 불편해하든 상관없이 내 행동을 밀어붙이는 것을 뜻하며 썼을까? 혹시 한 사람 한 사람이 처해 있는 상황은 제각각 다르니 그 나름의 상황을 헤아려 모든 것을 보고 판단해야 한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었을까? 이런 해석이라면 프로타고라스의 이 말은 되려 종래의 ‘이기주의’와는 반대되는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처지를 살펴보고 헤아리므로 다른 이를 존중하고 배려한다. 그의 ‘척도’가 나의 ‘척도’와 다름을 알고 함부로 하지 않는다. 

  프로타고라스는 신들이 존재하는지 아닌지,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결코 우리 인간은 알 수가 없다고 했다. 이에 대한 탐구는 그 자체로 모호한 데다 우리 인생 또한 너무 짧다고도 했다. 결국 프로타고라스는 신성모독으로 고발되어 아테네에서 추방당했다. 이것 또한 그들 소피스트의 극단적 상대주의로 몰아붙일 수도 있겠으나, 내가 보기엔 기존 권위에 도전하는 지식인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물론 이러한 해석 또한 거리를 둘 필요는 있겠다. 그들에 대한 정보는 너무나도 제한적이다.)


  그다음 고르기아스. 사실 나는 고르기아스의 회의주의가 무슨 문제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소 극단으로 볼 표현이 들어가 있기는 하나 근대 인식론 철학으로 들어가면 이와 비슷한 표현과 내용은 수없이 나온다. 17세기 이후 영국에서 나타난 근대 경험론의 한계를 지적하는 말과 뭐가 그리 크게 다른지 모르겠다. 합리론과 경험론을 다룰 때는 그와 비슷한 표현들을 크게 문제 삼지 않으면서 굳이 고르기아스의 회의주의 언어에 대해서는 ‘회의적 사고를 이 이상으로 밀고 나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세계철학사>, 한스 요아힘 슈퇴리히, 이룸, 213쪽)느니 하는 유난스러운 말들을 내뱉는다. 우리 인간의 경험과 감각의 한계를 지적한 말로 ‘온건하게’ 받아들이면 안 되는 걸까? 혹은 현상 너머의 그 알 수 없는 본질 세계보다, 불완전하나마 여기 이 세계를 바라보라는 ‘현실주의 세계관’으로 바라보면 안 되는 걸까?


  마지막으로 트라시마코스. 나는 그가 “정의는 강자의 이익을 의미”한다는 말을 정말 그 뜻 그대로 썼을지 아직도 미심쩍다. 그는 자기 말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다. 

  “법률을 제정할 때 각 정권은 자기의 이익을 먼저 생각합니다...(중략).. 일단 법을 제정한 다음에는 자기들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통치받는 사람들에게 올바른 것이라고 공표하고, 이를 위반하는 사람을 범법자나 올바르지 못한 사람이라고 처벌하죠...(중략)... 어떤 국가에서나 이미 수립된 정권이 권력을 쥐고 있으므로, 올바른 것이란 바로 강자의 이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국가>, 플라톤, 송재범 풀어씀, 풀빛, 22쪽) 

  나는 사실 여기서 트라시마코스가, 현재 권력을 잡은 이들이 ‘올바른 것(곧 정의)’을 독점하고 자기들 입맛에 맞는 정의관에 따라 사람들을 처벌하는 것을 못마땅해 하는 것으로 읽었다. 그저 현실을 비꼬고 냉소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이후 트라시마코스는 이상할 정도로 소크라테스에게 반박당할 만한 먹잇감들을 흘리고 쏟아 붓는다. 정말 트라시마코스가 진정으로 생각하는 것이 고작 “정의는 강자의 이익” 따위였을까. 

  이런 강한 의심을 하는 까닭은 이 말의 출처가 오직 플라톤의 저서(<국가> 제1권)이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소피스트를 어지간히도 싫어했다. 소피스트들은 그들 단독으로 책을 낸 것이 거의 없고 대부분 플라톤의 저서에서 이름이 언급된다. 그런데 좋게 언급된 경우는 거의 없다. 항상 그들은 부정적으로 묘사된다. 소피스트의 궤변론자 이미지도, 돈만 밝히는 이미지도, 극단적 상대주의자 이미지도, 옳고 그름에 무관심한 비윤리적 이미지도 대부분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린) 플라톤, 그에게서 나왔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했던가. 철학사는 생각의 역사라 할 수 있고, 이 생각의 역사에서는 적어도 플라톤은 승자 중의 승자다. 그는 가히 서양의 철학사를 지배했다. 우리가 봐왔던 소피스트는 승자 플라톤의 눈을 통해 본 소피스트다. 우리가 알고 있는 소피스트는 진짜 소피스트가 맞는가. 때마침 고르기아스가 곽노근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첫째로, 이 세계에 존재하는 소피스트는 아무도 없다. 둘째로, 존재한다 해도 그게 진짜 소피스트인지 알 수 없다. 셋째로, 안다고 하여도 진짜 소피스트는 다른 이에게 전할 수 없다.” 


  우리는 결코 진짜 소피스트를 알 수 없고 전할 수 없다.     


위대한 소피스트여

  함부로 누가 위대하다는 말을 잘 쓰지 않는다. 누구를 우상시하는 듯한 표현은 항상 경계하는 편이다. 그러나 쓰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의 소피스트가 눈에 들어왔다. 

  소피스트가 활동하던 곳은 기원전 5C~4C 그리스이며 소크라테스, 플라톤이 활동하던 시기와 겹친다. 많은 소피스트가 그리스 중에서도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의 아테네에서 활동했다, 그 당시 아테네는 민주주의가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근현대 민주주의 역사는 자유와 더불어 평등의 역사였다. 신분에 따른 차별을 없애고, 성별에 따른 차별을 없애왔다. 신분에 대한 또렷한 구분이 남아 있는 한 그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민주주의 자체가 ‘신분’이 없는 세상을 전제로 한다. 이제 아테네를 보자.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이, 누구인가. ‘시민’이다. 그 ‘시민’에는 노예, 외국인, 여성은 포함되지 않았다. 그 ‘시민’은 과연 몇 명이나 되었을까. 아테네 전체 인구가 20만~25만 정도라고 했을 때, ‘시민’은 2만~3만 정도였다. 아테네 ‘시민’은 명백히 특권 계급이었다. 아테네 민주주의는 실은, 민주주의가 아닌 것이다. 당시 노예 노동이 있었기에 ‘시민’들은 먹고 사는 문제에서 다소 자유로울 수 있었고, 민주주의는 꽃피울 수 있었다. 나는 노예제를 등에 업은 아테네 민주주의를 자랑스러워하는 서구인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더불어 ‘그리스’ 바깥의 사람들을 ‘야만인(바르바로이)’이라 부르며 멸시한 그들의 자민족 중심주의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서구인들을 또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그 당시 이러한 신분제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는 사람은 사실상 없었다. 이건 그리스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인 현상이므로 그리스를 포함한 서양 문명에 특별히 더 비판적일 필요는 물론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이 다른 세계보다 특별히 더 잘나지도 않았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그리스 철학과 예술이 아무리 뛰어나대도 누군가를 짓밟는 토대 위에서 피어난 것이라면 그런 철학과 예술은 반성하고 또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행히도 그런 반성의 실마리를 제공한 그리스 철학자가 있었고, 그 철학자는 우리가 그토록 궤변론자라고 비하했던 소피스트에게서 나왔다. 그 이름 바로 ‘안티폰’과 ‘알키다마스’다. ‘안티폰’은 사람들이 서로를 대할 때 저명한 가문 출신이면 존경하고 함부로 하지 않는 반면, 별 볼 일 없는 가문 출신이면 무시하는 것을 관찰하였고, 이러한 태도야말로 야만인 같다고 여겼다. 모든 인간은 자연 상태에서 모두 비슷하게 태어났다고 생각했고, 결국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알키다마스’는 고르기아스의 제자로, 신은 모든 이를 자유롭게 만들었고 ‘노예’를 만들지 않았다고 함으로써 사실상 ‘노예제 폐지’를 주장했다. 그리스 3대 철학 영웅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식의 주장을, 털끝만큼이라도 비슷하게 한 적이 있었을까? 단 한 번도 없다. 되려 계급 질서를 굳건히 하고, 그리스 밖의 야만인들을 멸시하는 발언과 사상을 전개했다면 전개했다. 


  나에게 의미있는 그리스 철학자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닌, 소피스트 ‘안티폰’과 ‘알키다마스’가 되었다. 발음하기도, 기억하기도 힘든 그 이름을 꼭 기억할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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