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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근노근 Nov 28. 2022

내 맘대로 서양철학사 - 소크라테스

땅의 철학자

  드디어 왔다. 땅의 철학자가, 땅으로 내려와 인간과 함께 부대낀 철학자가. 그 이름 소크라테스다. 흔히들 소크라테스를 저 위, 신에서 내려와 인간의 문제를 다룬 최초의 철학자라고 한다. 그는 자연철학자들처럼 자연 세계를 탐구하지도 않았다. 그는 인간과 대화하고 이 세상의 진리가 무엇인지를 생각한 ‘최초의’ 철학자다. 그런 의미에서 키케로는 소크라테스를 “철학을 하늘에서 땅으로 끌어 내린 사상가”라 했다. (그러나 그건 승자의 역사관일 따름이다. 소크라테스와 동시에 소피스트도 인간과 부대끼고 땅에서 철학을 했다. 소피스트는 패자고 소크라테스는 승자이므로 키케로는 승자 소크라테스만 추켜세웠다.)

  그는 태생이 땅의 사람이었다. 그를 세상에 있게 한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신의 아들도, 귀족도 아닌 땅의 사람이었으므로. 소크라테스의 아버지는 돌 다듬는 일을 하는 석공이었고, 어머니는 아이 낳는 것을 도와주는 산파였다. 

  그렇다고 그가 못 사는 축에 들지는 않았다. 땅의 사람이라고 해서 밑바닥 인생이거나 가난했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그는 적당히 잘 살았다. 그걸 알 수 있는 한 모습은, 그가 전쟁에 참여했을 때의 옷차림이다. 돈 많은 귀족은 말을 타고 나타났고, 그보다 못한 중산층은 갑옷과 투구를 사서 중장갑 보병으로, 그것도 살 돈이 없는 사람들은 맨몸에 돌 하나 들고 나타났다. 소크라테스는 갑옷과 투구를 입고 전쟁에 나타났다. 그는 중산층이었다.

  어쨌든 땅의 사람인 그는 고고하고 고상하게 어려운 낱말이나 허공에 대고 지껄이는 그런 철학자는 아니었다. 땅으로 내려와 직접 전투에도 네 번이나 참가했고, 피하지 않았다. 전투가 끝나고는 또 다른 땅을 어슬렁거리며, 맨발에 초라한 누더기 옷을 입고 광장을 기웃거렸다. 광장에서 이 사람 저 사람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만나 대화하고 토론했다. 귀족들의 품이 아니라 평민들의 품으로(그런데 그 평민들이 대부분 ‘시민’이라는 이름의 특권계급이긴 했다) 가 폭 안겼다. 

  생김새마저 그는 땅의 사람이었다. 그는 못생기기로 유명했다. 몹시 거친 피부에 개구리같이 툭 튀어나온 눈, 두꺼운 입술에 주저앉은 코, 머리도 위에가 휭 비었다. 사람을 생김새로 판단해서도 안 되고, 못생겼다고 놀려서도 안 될 일이다. 나는 그를 놀릴 생각이 없다. 오히려 그의 서민적인 행색과 생김새가 그를 더 특별하게 만들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한다.      


겸손의 철학자

  그는 겸손의 철학자다. 그는 지적으로 뛰어난 사람임에도, 말하는 것 보면 수사학과 논리학에도 일가견이 있는 사람인 것처럼 보임에도, 젠체하지 않는다. 나대지 않는다. 내가 잘났다고 떠벌리지 않는다. 잘난 사람 특유의 독선도 크게 보이지 않는다. (사실 전혀 없다곤 못하겠다. 그가 <소크라테스의 변론>에서 보여준 태도를 보면 당당함을 넘어 약간의 기고만장함이 있다.)

  그가 보여주는 잘난 체의 수준은 이정도다. 소크라테스에게 카이레폰(Chaerephon)이라는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가 델포이 신전에 가서 신탁을 받았다. 당시 사람들은 중요한 문제가 있거나 국가적으로 중요한 일이 있을 때 델포이 신전에서 신탁을 받곤 했다. 그곳에서는 무녀가 신을 대신해 대답해 주었다. 지금으로서는 그 무녀가 얼마나 제대로 대답을 하겠어, 라고 생각을 할 수 있겠지마는, 그 당시 그 신뢰는 절대적이었다.

  카이레폰은 이 세상에서 누가 가장 지혜로운지 물었다. 답은 어떻게 나왔을까. 놀랍게도 답은 ‘소크라테스’. 카이레폰은 그 사실을 소크라테스에게 즉시 알렸고, 겸손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믿지 못했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지혜롭다고?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한 소크라테스는 지혜로운 사람들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지혜롭기로 소문난 정치가, 장인, 시인을 찾아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렇게 대화를 해 보면 그들이 나보다 지혜로운 것을 알 수 있으리라 여겼다. 나는 그렇게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거라 여겼다. 그러나 결과는 어땠을까. 

  생각과 달리 그들은 무지했다. 아는 것 없이 아는 척하기 바빴다. 그리하여 소크라테스는 한 가지 깨달은 게 있었다. 

  ‘그들이나 나나 똑같이 아무것도 모르지만, 적어도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

  후대 사람들이 이름 붙인 ‘의식적 무지’가 그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적어도 자기가 무지하다는 것을 알기에 그만큼은 지혜로웠다. 그의 잘난 체 아닌 잘난 체는 고작 이정도 수준이었다.      


대화의 달인소크라테스

  그는 아고라, 즉 광장으로 갔다. 가서 닥치는 대로 사람을 붙잡고 대화했다. 그는 대화의 달인이었다. 그의 대화법은 흔히 묻고 답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문답법으로 불린다. 문답법은 다시 두 단계로 나뉘는데, 첫째, 반어법의 단계이다. 소크라테스는 상대방이 알고 있는 사실과 반대되는 것들을 끊임없이 말하면서 상대방이 스스로 무지하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 그 스스로 무지를 자각하게 해 준다. 둘째가 산파술의 단계이다. 상대방은 소크라테스와 대화하면서 스스로 무지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 산파가 산모 스스로 아기를 낳을 수 있도록 도와주듯, 소크라테스는 대화 상대방이 그 스스로 진리를 파악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래서 산파술(산파법)이다. 

  소크라테스와 한 청년의 대화를 보자.      

              


소크라테스 : 자네는 용기가 무엇인지 알고 있나?


청년 : 용기는 두려움이 없는 상태입니다.


소크라테스 : 그럼 두려움이 없는 상태가 모두 용기인가?


청년 :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절벽에서 뛰어내릴 수 있는 사람은 두려움이 없는 상태이지만 그런 사람을 우리가 용기 있다고 말하지는 않으니까요.


소크라테스 : 그럼 두려움이 없는 상태 외에 용기는 어떤 것을 더 필요로 한다고 보는가?


청년 : 마땅히 해야 하는 것에 충실할 때가 아닐까요?


소크라테스 : 마땅히 해야 하는 것에 충실할 때는 언제를 말하는가? 예를 들어 보게.


청년 : 페르시아가 침략해 왔을 때 시민들을 구하기 위해 전쟁에 나가는 것이 예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소크라테스 : 그럴 수 있겠군. 그럼 전쟁에 나가지 않는 것은 용기가 아닌가?


청년 : 만약 전쟁에 나가지 않는 것이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것 또한 용기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소크라테스 : 그렇다면 용기는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인가?


청년 : 제 생각에는 그렇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과 이야기를 하다 보니 제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용기라는 것이 단순히 두려움을 이겨 내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저는 모르고 있었는데 대답을 하는 과정에서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소크라테스 : 이제 자네는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비로소 새로운 지식에 도달했네. ‘나는 모른다’는 사실을 잊지 말게. 그래야 새로운 지식을 얻을 수 있고 진리를 알기 위한 인생을 살 수 있네. 




  위 대화는 소크라테스식 문답법의 전형이다. 소크라테스와 청년이 묻고 답하면서, 서서히 상대방 청년은 자기 스스로 ‘용기’가 정확히 무엇인지 몰랐다는 것을 알게 한다. (반어법의 단계)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답하면서 청년은 어느샌가 ‘용기’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산파술의 단계)

  소크라테스는 그렇게 끊임없이 대화하고 질문했다. 그리하여 상대방이 스스로 무지하다는 걸 깨닫게 했고, 진리에 가까운 대답을 하게끔 끌어냈다. 누구에게나 그 안에 진리를 품고 있다는 그의 믿음은, 그의 대화법으로 증명되었다. 위 청년은 이미 그 안에 ‘용기’라는 관념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아무것도 모르긴 했지만, 그 속에는 무궁무진한 잠재력이 있었던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역할은 그것이다. 그의 산파법으로 그 잠재력을 끌어내는 것. 그 청년 안에 있는 ‘용기’라는 관념을 끌어내는 것. (결국 이런 생각은 후에 플라톤의 ‘이데아론’으로 연결된다.)

  그의 대화법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나는 조금 불편했다. 그의 겸손한 태도, 젠체하지 않는 태도가 그 불편함을 일부 가리긴 했으나 다시 곰곰 생각해보건대, 불편하다. 왜냐하면, 그는 ‘토론’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건 또 무슨 말일까.

  얼핏 그는 토론을 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그는 토론을 하지 않는다. 토론이란, 생각이 다른 두 사람이 서로 자기의 생각을 견줘 보고 서로 설득하는 것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와 상대방의 대화는 그런 것이 없다. 언제나 무지한 상대방을 소크라테스가 문답법을 통해 일깨워주는 식이다. 물론 소크라테스의 태도는 언제나 겸손하고 너그러우며 상대방의 무지를 업신여기지 않는다. 그의 그런 태도는 그것대로 본받을만한 부분이지만, 본질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언제나 소크라테스는 상대방을 가르치고 계몽시킨다. 그의 그런 계몽적 태도는 아마도 진리에 대한 열정 때문일 것이다. 아직 소크라테스, 나 자신도 그 진리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지만(이런 유보적인 태도는 꼭 필요하며, 어쩌면 플라톤과 소크라테스를 다르게 평가할 수 있는 부분일 수 있겠다.), 진리는 분명히 있으며, 그 진리를 사람들로 하여금 끌어내겠다는 그 열정. 

  “검증받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라는 뜻깊은 말을 남겼지만, 정작 그 자신은 그와 다른, 어쩌면 진리가 아닐 수 있는 생각들에 충분히 검증받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크산티페를 위한 변명

  크산티페 변명 좀 해야겠다. 

  크산티페는 소크라테스의 악처로 유명하다. 소크라테스에게 불만이 많은 크산티페, 잔소리를 시전한다. 그럼에도 자기 생각에만 빠져 있고 대꾸하지 않는 소크라테스를 보자 열불이 난 크산티페는 물이 가득 든 양동이를 소크라테스의 머리에 부어버린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태평하게 이렇게 말했다. 

  “천둥이 치더니 이제 비가 오는구나”

  이 일화는 크산티페의 도를 넘는 행동과, 성인 소크라테스의 의연함을 보여주려고 한 것일 게다. 크산티페가 정말 욕먹을 인물인지는 앞뒤 맥락을 알아야 한다. 차근차근 살펴보자. 

  일단 크산티페는 왜 그렇게 소크라테스에게 잔소리를 퍼부었을까? 그토록 심하게 잔소리만 하지 않았어도 이런 사달이 나지는 않았을 텐데. 이유는 소크라테스의 무책임함 때문이다. 그 무책임함이란 이런 것이다. 당시 크산티페와 소크라테스 사이에는 자녀 셋이 있었다. 그 자녀는 누가 키우나. 현대의 관점으로는 둘이 같이 키우는 게 맞다. 과거의 관점으로도 같이 키우는 게 맞다. 다만 과거의 한계로 인해 여성인 아내가 육아를 전담하고, 남성인 남편이 돈을 벌어오는 역할 분리가 일어난다. 성 역할이 고정돼 있는 건 아쉬운 일이나 그건 시대의 한계고,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남성들을 특별히 욕하진 않겠다. 다만, 어쨌든 그렇다면 남자는 돈을 벌어오는 것이 최소한의 책임감 있는 행동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어땠는가. 

  그는 매번 광장으로 나가기 바빴다. 거기서 “지혜를 낳는 산파” 역할을 하면서 사람들을 무지에서 벗어나게 했다. 자기는 가르친 게 없고 당신들 스스로 깨친 거니 돈을 받을 수 없다며 강의료도 받지 않았다. 멋있고 뜻있는 행동이다. 그러나 그동안 아내 크산티페는 어땠을까. 남편이 돈을 벌어서 얼마라도 줘야 아이 셋을 먹이든 입히든 할 텐데, 돈이 없다. 쫄쫄 굶었을 테다. 자기라도 일을 해서 애들 먹이고 키워야 할 텐데, 여성이 일을 구할 수 있는 사회가 아닌 건 차치하고라도, 아이 셋을 키우며 일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크산티페는 남편 소크라테스에게 말한다. 광장에 나가는 거 좋은데, 제발 돈 좀 벌어오라고. 나랑 애들 굶고 있는 거 안 보이냐고. 아무 대꾸도 않는 소크라테스에게 물 한 바가지 퍼부은 게 그리 잘못한 일인가. 

  그렇게 광장에서 사람들과 대화하며 사람들을 무지에서 벗어나게 하는 행동이 좋았다면, 그래서 아이를 돌볼 여력이 없다면, 그는 애초에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도 낳지 않았어야 했다. 혼자 산다면 그가 광장에서 뭔 짓을 하든 그게 무슨 상관인가. 하지만 그는 결혼을 했고 아이를 셋이나 낳았다. 그렇다면 아무리 위대한 일도 잠시 멈춰야 한다. 자기를 돌아보고, 자기 옆에 있는 사람들을 돌아보는 것이 먼저다. 사실은 그게 더 위대한 일이다.

  그래 놓고서 소크라테스는 어쩌다 저런 부인과 결혼했냐는 질문에 아래와 같이 대답했다.

  “말 타는 기술을 익히고자 하는 사람은 사나운 말을 골라서 탑니다. 사나운 말을 다룰 줄 알게 되면 다른 말을 다루기란 쉬운 일이거든요. 내가 이 여자를 견뎌낼 수만 있다면 천하에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이란 없을 게 아닙니까?”

  다시, 쉴 새 없이 떠들어 대는 부인의 투정을 어떻게 참느냐는 질문에 소크라테스는 대답한다. 

  “물레방아가 돌아가는 소리도 귀에 익으면 들을 만합니다.”

  결혼을 하는 게 옳은지 안 하는 게 옳은지 묻는 질문에도 이렇게 답했다.

  “결혼을 하시오. 좋은 아내를 얻으면 행복할 것이고 나쁜 아내를 얻으면 철학자가 될 테니까요.”

  성 인지 감수성 따위 기대할 수 없는 시대적 한계가 있다지만, 그는 4대 성인 아닌가. 시대적 한계에 갇힌 4대 성인이란 어색하다. 4대 성인에서 그를 빼주기 바란다. 그의 헛소리를 듣고 있기가 힘들다.      


소크라테스는 반민주주의자였는가

  아테네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한 때가 있었다. 바로 스파르타와의 전쟁(펠로폰네소스 전쟁) 직후였다. 아시다시피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그리스 내에서 경쟁 관계였고, 언제고 한 번은 터질 관계였다. 두 나라는 부딪혔고 전쟁은 일어났다. 결과는 반민주주의 국가 스파르타의 승. 맘 같아서는 아테네를 지도에서 지워버리고 싶었겠지만, 오랜 전쟁에 지쳐 제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들었던 스파르타는 그러지 못했다. 대신 아테네 안에 친스파르타 정권인 ‘30인 참주정’을 세웠다. ‘참주’란 쉽게 말해 독재, 독재자 정도로 생각하면 되겠다. 

  다행히 얼마 가지 않아 ‘30인 참주정’은 무너졌으나, 그 1년 정도의 짧은 시간 동안 30인 참주가 저지른 짓들은 참혹했다. 시민들의 권리를 축소했고, 자신들의 뜻에 반하는 자들은 모두 참수시켰다. 그 30인 참주를 이끌었던 인물이 ‘크리티아스’라는 자인데, 그는 바로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다. 그의 제자 중 문제가 있는 인물은 많다. 그와 동성애 관계(그리스에서는 흔했다)였을 것으로 추측되는 제자 ‘알키비아데스’가 그렇다. 제자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인으로서 아테네 편에서 스파르타와 싸우다 졌는데, 아테네 패배의 원인이 그에게 돌려지자, 냅다 스파르타로 튀었다. 그러고는 스파르타에 아테네의 고급 기밀 정보를 다 넘겨주고 스파르타 편에서 싸웠다. 

  그때부터였을까, 그에게 반민주주의자 딱지가 붙은 것이. 게다가 그는 파시즘 체제와 유사한 스파르타를 옹호하는 듯한 발언을 한 적도 있고, 아테네 민주주의 아래에서 사형당해 죽었으니 그가 민주주의에 호의적이지 않을 거라는 추측은 응당 타당해 보인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변론>에서 소크라테스가 밝혔듯이 그의 제자들(크리티아스, 알키비아데스 등)이 그의 뜻대로 행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를 욕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또 그는 30인 참주정 아래에서 나름 그들 참주와 각을 세우며 살았다. 적극적 저항자는 아니었을지언정 소극적으로는 저항하며 살았고 참주에 협력하지 않으며 나름 곧게 살았다.

  스파르타를 옹호한 듯한 발언은 극히 일부에 해당하며 그의 중심 사상이 아니었다. 또 그는 아테네 민주주의 아래에서 죽었기에 아테네 민주주의에 비판적이고 아테네 민주주의를 증오했을 수도 있겠지만, 민주주의를 비판한다고 해서 반드시 반민주주의자라는 보장은 없다. 나도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비판하고, 특히나 아테네 민주주의는 더 비판하지만, 나는 민주주의자다. 소크라테스가 민주주의자라는 확신은 없지만 그렇다고 반민주주의자, 나아가서 파시스트인 것처럼 말하는 것(예컨대 박홍규의 <소크라테스 두 번 죽이기> 같은 책)은 과하다. 최소한 그는 자신이 탐탁지 않게 여겼던 아테네 민주주의를 존중했고, 그래서 충분히 도망가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체제 안에서, 의연하게 죽었다. 

  이와 관련하여 한 마디 더 덧붙이자면,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두고서 민주주의 한계를 얘기하는 이들이 있다. ‘그거 봐라, 대중들의 잘못된 중우정치로 위대한 철학자 한 명이 죽었다. 민주주의는 위험하다.’ 이는 아테네 민주주의를 ‘민주주의의 전형’으로 착각한 데서 오는 오류라 할 수 있다. 아테네 민주주의는 한계가 많은, 그냥 초기 민주주의의 한 모습일 뿐이다. 이를 마치 현대 민주주의와 같은 것처럼 취급하고 현대 민주주의 또한 문제가 많은 것처럼 이야기하는 건 옳지 않다. (현대 민주주의가 완벽하다는 게 아니라, 아테네 민주주의를 근거로 삼는 게 부적절하다는 뜻이다. 현대 민주주의라고 왜 문제가 없겠는가.) 아테네 민주주의는 앞에서도 얘기했듯, 노예, 여성, 외국인들을 시민에서 제외하고 차별한 반쪽짜리 민주주의였을 뿐만 아니라, 현대 민주주의 핵심 사상이라 할 수 있는 ‘인권’의 요소가 거의 들어가 있지 않다. 현대 민주주의 아래에서 소크라테스가 재판받았으면, 무죄가 났을 거라 나는 확신한다. (기소조차 안 됐을 가능성이 크다.) 종교의 자유(그의 죄목 중 첫 번째는, 아테네에서 믿는 신들이 아닌 ‘다이몬’이라는 다른 신을 섬겼다는 것이었다.), 사상과 언론의 자유(그의 죄목 중 두 번째는,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것이었다.) 따위 하나도 지켜지지 않은 소크라테스 재판이, 그저 다수결이라는 민주주의에서 가장 하위의 원칙을 지켰다는 이유로, 민주적이라고 할 수 있는가.  

   

소크라테스와 노예제도

  결론은 언제나 노예제도다. 끊임없이 생각하고 성찰하고 묻고 기존의 상식에 도전했던 소크라테스도 현실의 계급적 모순은 하나도 건드리지 않았다. 공허하다, 그의 산파법, 그의 다이몬이.       

   

덧)

지금의 관점에서 봤을 때 소크라테스는, 직업에 귀천이 있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내비치고 있는 대목들이 몇 있다.     

1)플라톤 <국가>에서 : 열등한 철학자들을 설명할 때 그 모습을 "대머리인 작은 땜장이가 돈을 벌어서 방금 속박에서 벗어나 목욕을 하고 새 옷을 차려입고 신랑처럼 꾸민 뒤 몰락해버린 주인의 딸과 막 결혼하려고 하는 모습"이라고 했다.     

2)크세노폰의 <변명>에서 : 자기를 고발한 가죽 기술자 아니토스에게 "자신의 아들을 가죽 일이나 하도록 교육시키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땜장이와 가죽기술자를 하찮게 보는 시각이 여실히 들어난다. 역시 그를 4대 성인에서 빼야하지 않나 생각한다. 다만, 저게 진짜 소크라테스가 한 말인지는 조금 의심해 볼 여지는 있다. 플라톤과 크세노폰이 그냥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자기들 하고픈 말을 한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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