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라 쓰고 '도망'이라 읽는다.
[King Kong, 2005] 이 영화는 피터 잭슨 감독이 '반지의 제왕 시리즈' 다음으로 만든 작품이다.
한국에서도 4백만 관객을 넘었으니 꽤 성공을 한 영화라 할 수 있다.
나는 이 영화를 2006년쯤 서울의 한 구석 텅 빈 사무실에서 혼자 봤다.
당시 이 영화를 보면서 놀랐던 점 두 가지가 있는데,
첫 째는 킹콩의 털이 부드럽게 바람에 날리며 멋진 눈빛으로 노을을 바라보는 장면이고,
두 번 째는 '나오미 와츠(Naomi Watts)'라는 배우가 너무나 연기를 잘하는 것이었다.
위 캡처 장면은 킹콩이 위기에 처한 '앤(나오미 와츠)'을 구하기 위해 처절한 결투를 벌인 후
본인의 근거지에 도착해 휴식을 취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의 느낌을 말로 설명하긴 어렵다.
앤이 킹콩에게 처음으로 마음을 여는 이 부분은 내 기억 속에 잊히지 않는 명장면으로 남아있다.
나는 일출 보다 일몰을 좋아하는데 아마도 이 영화가 큰 영향을 준 게 아닌가 싶다.
육체의 피로가 겹으로 쌓이고 정신적 스트레스가 극한에 이르러 우울증이 찾아올 때면
나는 킹콩의 이 장면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그리고 이런 소릴 한다.
"나도 저렇게 좀 쉬고 싶다."
여행 업계에는 성수기와 극성수기를 구분한다.
성수기는 대체로 여름, 겨울 방학을 포함한 일반적인 휴가시즌을 말하고,
극성수기는 추석, 설날, 크리스마스 같은 연휴 때를 말한다.
여름 성수기가 끝날 무렵 더이상 못 버티겠다는 생각이 들어,
"9월 말에 휴가 좀 다녀오겠습니다." 했더니,
"이번에는 추석이 9월 말이라 그때는 좀 힘들겠습니다."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서
"그럼 어쩌라고?" 하며 약간 짜증 내는 말로 대꾸했더니,
"선배님 추석 시즌에는 정말 빠지시면 안 돼요. 사실은 10월에도 휴가는 좀 어려울 거 같습니다.
팀이 너무 많네요." 하는 거다.
"그럼 나 여기서 죽으라고?" 하며 눈을 부라리니,
"형님, 다음 주는 어떠세요. 추석 시즌 시작되기 전에 한 열흘 정도는 손님이 좀 주는데요."
이러는 거 아닌가.
그날 저녁 집에 와서 바로 다음 주 출발하는 비행기표를 끊었다.
이건 휴가라기보다 '도망'에 가깝다. 그래도 어쨌든 며칠 쉴 수는 있게 됐다.
휴가가 끝나면 결국 같은 생활로 돌아오겠지만, '여행'은 떠나기 전의 기대가 만족감의 절반 아닌가.
모든 여행은 준비할 때가 더 행복한 법이다. 비행기 표를 끊는 순간 이미 스트레스의 절반이 사라졌다.
한국에 운우지정(雲雨之情)을 나눌 친구가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없어도 괜찮다.
그리운 사람은 몇 있으니 그들이 바쁘지 않아 잠깐이라도 만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가을의 종로 거리에서 하는 쇼핑이 너무나 기대된다.
따릉이를 타고 황학동 시장에서 세운상가까지 달릴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마음이 설렌다.
허리우드 극장 입구 돼지국밥은 아직도 맛있을까? 벌써부터 군침이 돈다.
며칠 안 남았다.
말린 망고라도 좀 사서 쟁여야겠다.
"한국의 가을 단풍이 조금만 더 빨리 물들면 좋을 텐데...." 하는
쓸데없는 생각이 자꾸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