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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랑끝 Dec 09. 2023

위스키를 마셔보기로 했다.

"'중독'과 '몰입'은 달라요..."

나는 술을 못 마신다.

내가 마실 술을 내 손으로 사본 것이 평생 손으로 꼽을 정도이니 얼마나 술을 못하는지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런 내가 어제 위스키를 한 병 샀다. 그것도 700밀리짜리로...

작은놈으로 살 생각이었는데 우리 동네 주류 전문점에는 작은 병을 팔지 않았다.  


매장을 한참 기웃거리다가 라벨이 예쁜 'CHIVAS REGAL, Extra 13'이라는 놈을 집었다.

소주 2잔이 치사량인 나로서는 이 사이즈의 술은 5년 치 알코올 섭취량을 훨씬 웃돈다.

술도 못 마시는 내가 덜컥 술을 산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새벽 2시가 넘어 공항에 나가는 일이 잦아지면서 하루 3시간 수면도 힘들어졌다.

특히, 새벽 3시에 도착한 손님들을 아침 7시에 집합시켜 6시간 일정의'호핑투어'를 나갔다 오면 

손님이고 가이드고 거의 초주검이 된다. 손님이야 끝나고 쉬면 되지만 가이드는 다음 일정을 

준비해야 하니 쉴 수가 없다. 그런 날은 이래저래 거의 혼이 나간 상태로 하루를 보내야 한다.


이런 미친 스케줄을 몇 달 하다 보니 정신이 몽롱해져서 갑자기 멍 때리며 행동을 멈추거나 

한 말을 또 하고 또 하는 단기 기억상실증 증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이 문제의 치료법은 오로지 휴식(수면)밖에 없는데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니 미칠 노릇이었다.

솔직히 잠잘 시간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낮에 3~4시간 짬이 나기도 하고 가끔은 일찍 일이 끝날 

때도 있다. 한데, 웬걸? 이럴 땐 또 잠이 오지를 않았다. 


낮에는 낮이라 잠이 오지 않고 밤에는 밤대로 카페인에 중독된 것처럼 긴장감이 수그러들지를 

않았다. 누워 있다 보면 점점 더 예민해져서 쉽게 잠들지 못했고 깊은 잠을 자는 건 불가능했다. 

평생 불면증이라는 걸 모르고 살았는데 피로가 심할수록 잠이 더 오지 않는 기이한 현상을 난생

처음 겪게 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너무 피곤해서 머리가 빠개질 것 같은 날이었다.

아무리 잠을 청해도 잠이 오지 않아 요기라도 할 요량으로 냉장고를 열었다가 드디어 불면증을 

치료할 해결책을 찾았다. 냉장고 야채실에서 숨어있던 소주 2병이 나온 것이다. 아마 몇 달 전 

손님이 주고 간 것이 야채실에 숨어있어 그동안 눈에 띄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난 그 길로 병을 

땄고 10분 후 행복하게 필름이 끊겼다.


그날 이후 낮이고 밤이고 침대에 누울 때면 무조건 소주를 한 잔씩 들이켰다.

이건 효과가 좋았다. 10분 안에 모든 일이 해결되는 신기한 경험의 연속이었다. 

집에 있던 소주가 다 떨어질 때쯤 와인 전문가(?) 흉내를 내는 후배와 했던 대화가 생각났다.


"형님, 전에 보여주신 주류판매점 사진에 '야마자키, やまざき(山崎).'가 있던데 그거 하나 사놓으시죠?"

"그게 뭔데?"

(예전에 와인을 구해달라는 손님이 있어 주류전문점 매대의 사진을 보낸 적이 있었다.

그때 사진에 '야마자키' 위스키가 찍힌 모양이었다.)


"일본 위스키예요."

"그게 뭐?"

"그 위스키 얼마인지 정확히 한 번 알아봐 주세요."

"그거 알아서 뭐 하게?"


"형이 보낸 사진 보니까 6천 페소대 던데 진짜 그 가격이면 하나 사놓으라고."

"내가 그거 사서 뭐 하게?"

"그거 한국에 오면 30만 원도 넘어요. 한 병 사 오면 비행기값 빠져"

"엥? 그런 게 있다고?"


다음 날 확인해 보니 그 친구 말마따나 그곳에는 한국에서 비싸다는 위스키들이

꽤 싼 가격에 전시되어 있었다.


"야! 이게 뭐라고 이렇게 비싸냐?"

"이름 값 하느라고 비싸지 뭐. 다음에 들어올 때 한 병 사 와요. 돈 줄게"

"헐~~~"


알아보니 한국에서 '야마자키' 12년은 40만 원대, 18년'산은 거의 200만 원에 육박했다.

"도대체 위스키가 왜 그렇게 비싼 거야?"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 주류판매점 앞을 지날 때면 괜히 들어가서 야마자키를 훑어보며

"저거 한 병 사놓을까?" 생각을 하곤 했다.


위스키에 대해 문외한이었던 난 '야마자키'를 검색하다가 '싱글 몰트'와 '브랜디드 위스키'가 

어떻게 다른지 위스키 종류는 뭐가 있는지 정도는 알게 됐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집에 있던 소주가 다 떨어졌다.

동시에 '야마자키' 생각이 났다.   

 

"이 기회에 '야마자키'나 한병 사자 어차피 혼자 마시면 오래 마실테니 남으면 

한국 가서 그 녀석 주면 되잖아!"  

다음 날 부푼 마음으로 주류 판매점을 갔더니 "아뿔싸~!!" 아니나 다를까.

'야마자키'가 보이지 않았다. 점원에게 물어보니 며칠 전에 팔렸다고, 

다음에 언제 들어오냐고 물으니 점원은 어깨를 으쓱하며 미소를 지었다.

젠장....., 쩝..... 늘 그렇듯이 미뤄서 잘 되는 일은 없다. 


"도대체 몇 년 산이었을까? 설마 18년 산은 아니었겠지?"

이런 생각을 하며 이왕 위스키를 살 생각에 왔으니 다른 거라도 사자는 생각으로 덜컥 

'시바스 리갈 엑스트라 13년'을 집은 것이다. 내가 이 술을 고른 이유는 그나마 아는 이름인 

데다 가격도 적당했기 때문이었다. '조니워커 블랙 12년'과 둘을 한참을 비교를 하다가,  


"12년보다는 13년이 아무래도 좀 낫겠지?" 

이런 혼잣말을 하며 묵직한 위스키 병을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가끔 사람들이 묻는다.

"왜 여기서 살아요?" 혹은 "여기 사는 게 좋아요?" 또는 "왜 이러고 살아요?"


이 질문들에는 많은 것이 함유되어 있어서 선뜻 대답하기가 힘들다. 

묻는 사람에 따라 질문의 의도가 전혀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도 그때그때 대답을 달리한다. 


그런데 가끔 이렇게 답 할 때도 있다.


"한국에서는 술 마시는 게 경쟁력이더라고요.

근데 저는 술을 못 마셔서 한국 생활이 너무 힘들었어요."


이런 대답을 하면 젊은 친구들은

"아저씨 정말 옛날 사람이네요. 요즘 한국 안 그래요."라고 하고,

나이가 좀 있는 사람들은 "그럴 수 있지" 하면서 고개를 끄덕이곤 한다.


와인 전문가(?) 친구와 이런 대화를 한 적이 있다.


나 : 야! 술 혼자 마시기 시작하면 그게 알코올 중독 초기 증상이래 '알코올 의존증'이라는 거라고.

와인 전문가: 저는 혼자 마시지 않는데요.


나 : 집에서 만날 혼자 와인이며 위스키며 마신다며?

와인 전문가: 혼자 즐기는 거죠.

나 : 그건 말장난이고.

와인 전문가: 말장난 아닌데요.


나 : '마시는 거'나 '즐기는 거'나 어차피 알코올이 몸에 들어가는 건 똑같잖아?

와인 전문가: 2차 3차 가서 술게임하며 들이붓는 걸 마시는 거라고 하는 거죠.

위스키나 와인을 즐기는 건 스스로 몰입해서 감상하는 거예요. 

예술품을 감상하는 것과 비슷한 행위죠.


나: 어쨌든 알코올을 정기적으로 섭취하면 중독이 된다고, 특히 혼자서!!

와인 전문가: 여럿이서 필름 끊길 때까지 부어라 마셔라 하는 게 중독에 가까울까요,

혼자 오랜 시간 즐기면서 마시는 게 중독에 가까울까요?

나 :......... (우 씨~~~, 왜 이렇게 말을 잘해? 자꾸 생각할 거리를 만드네~)


와인 전문가: '중독하고 '몰입'은 다른 거예요.

'중독'은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만 '몰입'은 타인에게 피해를 주진 않죠.

나 : 피해를 주고 있는데 본인만 모르고 있는 건 아니고?

와인 전문가: 아닐걸요?

나 :...... (쩝~~~)


어제 처음으로 '시바스 리갈 엑스트라 13'에 얼음을 넣어 봤다.

그동안 빨리 자고 싶어 계속 스트레이트로만 마셨는데 얼음을 처음으로 넣어 본 것이다. 


신기하게도 위스키에 얼음을 넣으니 맛이 훨씬 부드러워지며 마시기가 편했다.

"어라? 얼음을 넣으니까 마시기가 훨씬 낫네?"

이런 혼잣말을 하며 잔에 남은 갈색 액체를 보다가 생각이 들었다.


"똑같은 술인데 얼음만 넣어도 맛이 이렇게 바뀌는구나.

내일은 어디 가서 탄산수 같은 걸 사 와서 한 번 섞어 볼까?"

아니 그것 보다 어디 가서 유리잔 하나 사야겠다."

난 그동안 위스키 잔이 없어 작은 유리병을 위스키 잔으로 쓰고 있었고,

얼음을 넣은 건 테이크 아웃 커피잔이었다.

 

지난달까지 난 혼자 술을 마실 것이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다.

사실은 '시바스 리갈 엑스트라 13'을 사고 며칠 뒤 '조니워커 블랙 라벨 12년' 작은 병을 

편의점에서 한 병 더 샀다. '시바스'를 몇 잔 마시다 보니 그날 사려다만 '조니워커 블랙'의 

맛이 너무나 궁금했기 때문이다. 


요즘 며칠 혼자 위스키를 마시다 보니 와인 전문가 친구의 말마따나 위스키를 즐기는 것이 

예술품을 감상하는 것과 같은 느낌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잉여의 시간을 자신을 위해 

몰입하는 면에서 틀린 말이 아닌 것 같았다. 


피곤함과 불면증 덕에 모르던 것을 알게 되는 즐거움이 생겼다.  

이런 행위가 치료를 빙자한 알코올 섭취의 변명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없는 건 아니지만 

현재로는 이번에 배운 취미 생활이 너무 마음에 든다.  


어떤 경로로 시작되던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이런 걸 '지적유희(知的嬉戱)'라고 했던가? 

아니 이번엔 '취적유희(嬉戱)'라 해야 맞으려나? 


어쨌든 새로 시작한 취미생활 덕에 여유 공간이 조금은 넓어진 듯한 느낌이다.

이런 느낌 참 좋다. 아직 이런 걸 배울수 있어 정말 다행이다. 


(다음에 '야마자키' 보이면 바로 사야지....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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