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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서 Jun 27. 2023

無의 시간

 불과 며칠 전의 일이다. 내가 아무 감정도 느낄 수 없게 되었던 것은. 단순히 감정이 메말랐다는 뜻이 아니다. 말 그대로 無의 상태. 매일과 같은 일과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난 모든 감정을 소진했다. 아니, 소멸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감정’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조차 없었다. 가장 최근에 초고를 완성한 소설의 주인공은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고 말했다. 사랑하는 이가 죽은 이후로 행복, 슬픔, 두려움과 같은 모든 감정들을 잃었다고. 내가 만든 인물임에도 불과하고 과연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는 게 가능한 것일까 하는 의문이 계속되었는데, 그날은 아주 가까운 주변의 누군가가 당장 죽는다고 해도 눈물 한 방울 흘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걸 몸소 경험하니 정말 불유쾌했다. 아니, 불유쾌한 감정조차 느낄 수 없었다.


 그날은 유독 이상했다. 식욕은 들지 않지만 무엇을 한 번 먹기 시작하면 아무리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고 공허한 느낌이 지속되었고, 텅 빈 안을 채워 넣기 위해 음식물들을 계속 밀어 넣어야 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지금 느끼는 이 공허감은 육체가 아닌 마음에서 온 것이라는 것을. 진실을 깨닫고 난 후에는 부질없는 섭취의 행위를 중단하고 무언가를 계속 찾아 헤맸다. 좋아했던 소설을 다시 읽고, 나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전해 받은 진심 어린 편지들에 매달려 보아도 이미 지워진 내면의 공백은 채워지지 않았다. 까맣게 타들어가는 것이라기보다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투명하게 증발한 것만 같았다.


 그 순간 나의 두려움은 간결했다. 사랑하는 이들에게 사랑을 주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과 더 이상 쓰지 못하게 될까 하는 두려움. 내가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 두 가지를 잃는다면 당장 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가만히 관조하는 것은 마음의 갈증을 해갈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경험을 미루어보아 잘 알고 있었다. 그 시간에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했고 나는 기록을 택했다. 별거 없던 그날의 일과와 먹었던 음식, 온도와 시(時), 내가 느꼈던 공허와 우울을 조금의 가미 없이 모두 기록했다. 언젠가 다시 無의 시간이 찾아와도 지금 이 시간의 기록을 보고 다시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는 조금의 희망을 품으며. 아직은 태어나 처음 겪어보는 이때의 경험을 입 밖으로 내는 것이 조금 두렵지만, 다시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위태로운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늘 그랬던 것처럼 언젠가는 웃으며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기록과 솔직함과 나 자신을 믿기에.


 기질적인 우울함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우울은 언제 또 단단히 쌓은 마음의 문을 부수고 들어올지 모른다. 그러니 내게 있어 마음이란 단수가 되기 전, 꼭 필요한 곳에 써야 하는 물과 같은 것이다. 마음의 단수는 언제 찾아올지 모르기에 혼신을 다해 사랑하는 이에게 마음을 쏟고, 엎지르듯 글을 써야만 한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게 전부다. 사용하지 않고 아껴둔 마음은 흐르지 못하고, 그렇게 고인 마음은 시간이 지나면 썩어 증발할 것이다. 이것이 내가 無의 시간에 얻은 유일한 깨달음이다.


우울은 잊을 만하면 불쑥 찾아오는 지독한 불청객. 죽지 않는 한 영원히 찾아올 평생의 단짝친구. 그리고 나는 또다시 부서진 잔해들을 주워 빗장을 덧댄다. 마음의 문이 다시는 부서지지 않도록. 다시 부서진 대도 기꺼이 수리할 수 있는 단단한 마음을 다시 한 모금 들이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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