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을 잘 알고 있고 이어질 장면과 그 씬에서 배우들이 할 말까지 모두 눈과 귀에 익었지만,
좋은 책이 읽을 때마다 새로운 것처럼 <나의 아저씨>도 볼 때마다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붕어빵이나 오뎅이 길거리에서 찬 바람을 맞으면서 먹어야 더 맛있는 것처럼 이 드라마도 그렇기에 나는 일부러 쌀쌀해진 출퇴근길에 추위를 뚫고 걸으며 이 드라마를 본다.
운동 삼아 원래 내릴 버스 정거장이나 지하철역에 다다르기 전에 내려걸으면서 이선균과 아이유가 주고받는 대사를 들으면 그 맛이 더 깊어진다.
"인간 다 뒤에서 욕해. 친하다고 뭐 욕 안 하는 줄 알아?
인간이 그렇게 한 겹이야? 나도 뒤에서 남 욕해 욕하면 욕하는 거지 뭐 어쩌라고? 뭐 어쩌라고 일러. 쪽팔리게..."
"미안하다. 내가 다그쳐놓고. 고마워. 때려줘서"
저 장면을 처음 봤을 때 내 심정이 딱 저랬다.
사회생활 2년 차, 서른이라는 나이. 그리고 한 아이의 아빠, 가장.
무중력을 체험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여러 무게에 지쳐있었고 특히 직장과 직장 내 인간관계 스트레스가 제일 견디기 힘들었다.
매일이 추석과 설의 연장선상 같은 회사생활에서 나는 내게 맞는 포지션을 찾지 못했다. 회사는 나를, 나는 회사를 서로 불편해했다. 직장 동료와 가족의 경계를 오가며 마치 명절 친척 모임 같은 질문이 이어지는 입사 초기부터 나는 뭔가 묘한,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나 보다.
그렇게 하루의 시작부터 끝까지 뒷담화로 보냈다. 퇴근해서 집에 오면 아내에게 쏟았고 점심시간에는 동기들에게 쏟고 카톡에서는 친구들에게 쏟았다.
그렇게 쏟아내면서 살다가 저 장면을 보고 멈췄다.
사장인 대학 후배의 괴롭힘, 아내의 불륜, 의지하는 형제들, 업무 등에 치이는 이선균과 그런 부장 밑에 있어서 불행하다고 뒷담화하는 대리의 뺨을 아이유는 때렸다.
뺨을 맞은 것은 드라마 속 대리인데 내가 뺨을 맞은 것 같았다. 여러 겹인 인간을 한 겹만 보고 그 점만 계속 욕하면서 친한 사람들을 계속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뒷담화는 좋은 힐링이고 치유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적당히 해야 한다는 점을 저 장면으로 마음에 새기게 되었다. 싫어하는 불편한 사람의 이야기로 좋아하고 편한 사람들도 불편하게 만드는 일을 하는 대신 가끔은 펜을 잡고 필사를 한다.
특히 그 싫어하던 이의 얼굴과 상황이 더 떠오르는 날에는 필사가 더 하고 싶어진다. 다시 첫 회사의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누가 봐도 내가 나가기를 간절히 티 나게 바라던 이가 있었다. 개인적인 오해일지는 모르지만, 사람이 보통 누군가를 심하게 미워하면 본인도 괴로워하는 티가 나기 마련이니 나만의 오해는 아니었을 듯하다.
서로 싫어하는 기운이 오가니까 그 사람의 카톡 프로필 속 가족사진, 아이들 사진도 같이 꼴보기 싫어지고 뭔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보게 되었다. 그런데 저 장면 이후 그 사람도 가정에서는 남편에게 또 아이들에게 내게 보이는 모습과 다른 여러 겹의 사람으로 인정받고 사랑받기 위해 살겠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괜히 '남을 싫어하는 에너지로 살아가는' 그 사람이 짠해지고 불쌍해졌다. 그래서 조금 더 편해지고 따뜻해진 마음으로 필사를 한다. 나도 남 욕하는 여러 겹의 사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