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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블 May 29. 2020

제초의 계절이 돌아왔다

민들레 학살자의 귀환

요즘같은 시기가 되면 기승을 부리는 것이 있다. 날씨가 따듯해지고 봄비가 몇 번 내리면 순식간에 지면을 뒤덮어버리는 불청객, 그들의 이름은 바로 들풀이다.


풀이 무성해지면 무엇을 해야하는가? 바로 제초이다. 군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계절 이벤트, 제설과 양대산맥을 이루는 제초의 시즌이 온 것이다.


부대에서 제초를 집중적으로 시행하는 시기는 지금같은 늦봄이나 초여름, 그리고 장마철이 끝난 이후이다. 온도가 높아지고 비가 잦아지면 온갖 이름모를 잡초들이 엄청난 속도로 자라기 시작하여, 부대 곳곳을 뒤덮는다. 군인 입장에서는 정말 사양하고 싶은 손님들이다.


몇년 전 부대 내의 제초와 제설을 민간에 위탁한다는 정책이 발표되어 여러가지로 이슈가 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내가 근무하는 오지의 소규모 부대에는 아직 꿈같은 이야기일 뿐이다. 올해 들어 몇번의 제초를 때로는 운이 좋아서, 때로는 업무를 핑계로 피해왔던 나도 결국 제초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무거운 배부식 예초기를 등에 매고, 왼손으로 루프 핸들을 쥐고 오른손으로 작업봉을 지지하는 자세로 작업을 시작한다. 등에 맨 엔진부의 무게도 상당하지만 작업봉도 꽤나 무거운데다, 엔진식 특유의 강렬한 진동때문에 장시간 작업하면 팔이 끊어질 듯 아프고, 힘을 빼고 있어도 손과 팔이 덜덜 떨린다. 바로 옆에 사람이 있어도 대화하기 힘들 정도의 소음과 제초기 날이 바닥이나 비탈면을 스칠 때마다 날아와 몸을 때리는 사금파리들은 덤이다.


물론 작업시에는 원칙적으로 안전장구를 착용하지만, 부족한 경우가 많아 다리나 팔을 보호하는 보호대는 거의 착용하지 못하고, 많은 경우 안면 보호구와 앞치마만 착용한다. 때로는 그것도 부족하여 안면보호구만 쓰고 작업을 하기도 하는데, 예초기 날에 부딪혀 날아오는 작은 돌맹이나 각종 사금파리들이 몸을 때리는 건 참을 수 있어도 얼굴이나 눈에 맞아서야 작업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루종일 대여섯 시간동안 작업을 하면 그 날은 온몸이 녹초가 되고, 앞치마를 착용했어도 전투복은 풀쪼가리로 범벅이 되어 잘 털어지지도 않으며, 몸에서 땀과 매연, 풀냄새가 뒤섞인 특유의 향이 떠나질 않는다. 부대안을 정글로 만들수는 없으니 제초를 안 할 수도 없지만, 개인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성가신 일이다.


아무튼 그렇게 고된 하루가 끝나가던 차에 내가 맡은 구역의 끝부분에서 민들레 군락을 발견했다. 무성한 초록색 사이로 샛노란 민들레들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광경은 평소같으면 무척이나 낭만적인 광경이었을 테지만, 다섯시간 동안 풀과의 사투를 벌였던 나에게는 그저 다른 잡초들과 마찬가지로 성가신 존재일 뿐이었다. 빨리 작업을 마무리하고 싶은 생각에 예초기의 회전수를 높이고, 맹렬한 기세로 민들레들을 제거해 나갔다. 그 광경을 옆에서 지켜보던 병사가 작업을 마친 나에게서 예초기를 받아들면서 한마디 했다.


"마치 민들레 학살자 같았습니다."


아니 잠깐, 말은 제대로 해야지. 애초에 초대도 받지 않고 와서 살림을 차린 민들레가 잘못이지, 왜 내가 나쁜것처럼 말하는 거야? 잘못된 건 불법거주자 행세를 하고 있는 민들레라고!


하지만 나는 병사의 말에 실제로는 그저 웃기만 했다. 반론을 할 체력조차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아, 가증스러운 민들레 같으니. 역시 세상은 예쁜 게 중요한건가. 예뻐도 상관없으니 빨리만 자라지 않으면 좋겠다. 그럼 또 제초를 해야 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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