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어깨아빠 Mar 19. 2024

효과는 모르겠고, 일단 먹자

23.09.20(수)

오늘은 늦은 퇴근이 예정되어 있었다. 이걸 아내에게 미리 말하지 못했다. 아침에 출근하면서 아이들에게 엄마에게 대신 좀 전해달라고 했다. 메시지로도 남겼다. 오랜만이기도 하고 아내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니 괜히 미안하기도 했고 걱정도 됐다.


소윤이는 피아노 수업이 있었는데 데려다 줄 사람이 없었다. 가르쳐 주시는 집사님이 집으로 와서 데리고 가 주셨다. 누나를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이면 언제나 속이 상하는 시윤이에게는, 출근하기 전에 충분히 이야기를 했다. 시윤이가 순간의 감정에 휩싸여서 또 괜한 잘못을 범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소윤이는 피아노 수업이 끝난 뒤에도 집사님의 딸(소윤이와 동갑)과 놀고 왔다고 했다. 집사님이 점심도 사 주시고, 집으로 데리고 가서 한참 동안 놀았다. 오후를 다 보내고 돌아왔다. 그동안 시윤이와 서윤이는 엄마와 함께 나름대로 시간을 잘 보낸 듯했다. 아내도 이전의 날들보다는 움직일 기력이 조금 있는 듯했고 시윤이와 서윤이도 노력하는 듯했다. 아내가 시윤이와 서윤이에게 ‘기특하다’는 표현을 쓴 걸로 봐서는, 분위기가 좋은 듯했다. 아내가 다큐멘터리도 보여줬다고 했다. 서윤이는 역시나 팝콘을 찾았지만 팝콘은 없었다. 대신 과자와 견과류를 제공했다고 했다.


아무리 아이들이 잘 지내도 정상이 아닌 몸으로 혼자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거기에 ‘조금 있으면 남편이 온다’라는 희망도 없는 날에는 더더욱.


“하루가 참 길다 여보”


아내가 이 메시지를 보낸 시간이 오후 4시였다.


퇴근했을 때 아이들은 모두 자고 있었다. 아내는 깨어 있었다. 물론 매우 수척하고 기운이 없는 상태로. 입덧과 나 홀로 육아가 잘 버무려진 하루를 보낸 결과였다. 심지어 오늘은 집도 깨끗이 치워놨다. 입덧이 엄청 심할 때에 비하면 아주 좋아졌지만, 그 남는 기력을 집안일에 쓰지 말고 잘 간직하면서 쉬라고 그렇게 얘기를 해도 자꾸 움직이려고 한다. 주부의 본능이자 남편을 향한 미안함 때문에.


생전 영양제라고는 잘 챙겨 먹지 않는 내가 요즘 영양제를 꼬박꼬박 먹고 있다. 그런 거에는 둔해서 변화가 전혀 느껴지지 않지만 일단 먹고 있다. 여기서 최악은, 나까지 드러눕는 거니까 어떻게든 이 입덧의 터널은 무사히 빠져나가야 하니까.


사실 뭐가 됐든 좀 덜 먹어야 그게 최고의 영양제이긴 할 텐데.

매거진의 이전글 그래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