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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주 Jan 03. 2024

구식 타자기 안에서 숨쉬는 친구의 낄낄거림

[Review]전시 '맥스 달튼전'

몇 달 전에 이미 맥스 달튼의 전시회를 방문한 적 있다. 이번 전시회와 저번 전시회의 차이는 봉준호 감독 이후의 내용이 다르다는 것이었다. 저번 전시회에서 7평 정도의 방을 '반지의 제왕' 보드게임으로 꾸며놓았다면, 이번에는 음반이 가득 찬 다락방으로 꾸몄고, 이번 후반 전시회에서 특히 동화책의 내용을 추가했다.


두 번째로 감상하는 전시회기도 하고, 동행자 없이 홀로 천천히 즐기는 상황에서 다시 감상한 맥스 달튼의 전시회는 상당히 다른 느낌이었다. 사실 기획 단계에서 의도했던 전시회의 경험은 첫 번째와 비슷할 것이다. 동행자와 함께 걸어 다니면서 영화의 감상을 나누고, 작가가 숨겨둔 내용을 찾아내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달튼전'은 무겁기보다 동행자와 즐거운 대화를 나누기 좋은 전시회다. 팔짱을 끼고 작품을 감상하는 전시는 아니란 말이다. 그래서 아쿠아리움과 달튼 전의 시너지는 꽤 괜찮다.


63 아트와 아쿠아리움의 방문객과 많은 부분 공유하기 때문에 첫 번째 방문이나 두 번째 방문에서 가족 단위의 관람객들을 많이 보였다. 다만 아쿠아리움과 달리 달튼 전에서 다루고 있는 영화들이 대부분 고전에 가까운 것들이어서, 어린아이들은 쉽게 즐길 수 없는 전시였다. 가족 단위의 방문객 중 많은 어른이 아이들에게 영화의 내용을 설명하고 있었다.


가족 간의 대화가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다면 이런 식으로 완성되는 전시회는 꽤 유쾌한 것 같다. 아쿠아리움의 악당 게들을 박수 소리 비트로 도망치게 하는 것만큼 재밌지는 않겠지만, 어머니나 아버지가 즐기던 것을 아이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꽤 로맨틱하지 않은가.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자신이 경험한 것을 전달할 권리가 있고, 아이들도 그것들을 들을 권리가 있다.


내가 이번에 방문했을 때, 동행자가 없어 이야기 나눌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달튼의 전시회의 다른 면도 볼 수 있었다. 나는 이 느낌을 '레트로함'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일견 맥스 달튼의 전시회는 감각적인 그림과 영화산업이라는 거대한 문화산업을 다루고 있어 트랜디해 보이지만, 사실 달튼의 전시회는, -트랜디함이 시대적 변화를 얼마나 잘 반영하는가를 의미한다면- 상당히 '트랜디'와는 거리가 있다(물론 이런 레트로함 자체가 트랜디함이라고 이야기하면 할 말은 없다.하지만 달튼 전은 유행과 상관없이 정말로 고전의 향기를 그리워한다는 점에서 정말로 레트로하다).


달튼이 완성한 작품들이 상당히 고전 작품인 이유도 있지만, 오늘날에는 영화라는 소재 자체가 레트로한 소재가 되었다. 내가 대학생일 때만 해도 영화를 잘 감상하고, 또 여러 작품을 아는 것은 정말 멋진 일이었다. 문화에 관심 있는 친구들은 고전 작품을 얼마든지 감상했다. 하지만 플랫폼 영상과 30초가량의 쇼츠가 유행하는 오늘날, 영화는 내가 경험했던 영화의 위상을 유지하고 있지 않다.


'영화의 시대' 때는 많은 사람이 비슷한 것을 같이 감상했지만, '플랫폼 영상의 시대'에는 대부분 사람이 각자 취향에 따라 감상한다. 똑같은 영화를 보고 난 뒤 그 영화에 대해 묘사한 삽화를 보면서 깔깔거리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시대는 지났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맥스 달튼 전은 그것을 지향한다. 심지어 그것이 서울 한복판의 높은 빌딩 위에서 전시된다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사실 이러한 감상은 새로 추가된 동화책 세션에서 더 구체화되었다. 개인적으로는 '소리 지르는 꼬마 요리사'의 이야기가 흥미로워서 따로 동화책을 구매까지 했지만, 이 전시회를 잘 요약하고 있는 것은 이 동화보다는 같이 있었던 타자기와 공중전화기 이야기에 가까운 것 같다. 어머니가 사용하던 구식 타자기로 자신의 작문 숙제를 하는 아이의 이야기, 핸드폰으로 까맣게 잊던 공중전화기를 일련의 사고로 다시 발견하고 동네 사람들이 그것을 소중하게 된 이야기는, 왠지 고전 영화를 그린 달튼의 작품이 오늘날 63빌딩의 꼭대기 층에서 전시되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주는 것 같았다.


그래서 단순한 '트랜디로서의 레트로'에 초점을 맞춰 맥스 달튼을 경험하면 아쉽다. 시대에 빛바랜 매체와 고전 명작들을, 쉽게 이야기를 나누기 어려운 그림들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달튼전에는 타자기나 공중전화기처럼 시대가 지나 잘 찾지 않는 작품들이 잔뜩 걸려 있다. 하지만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본다면, 달튼이 숨겨놓은 작은 보물과 기쁨들을 찾을 수 있다. 노트북이나 최신 핸드폰에서는 찾을 수 없는 그런 기쁨 말이다. 나는 그래서 이 전시회가 좋다. 사실 세상의 좋은 것들은 의외로 손이 잘 닿지 않는 것들에 숨어있지 않던가.


아까부터 계속 소재 자체가 고전적이라고 표현하지만, 솔직히, 달튼의 매력 있는 작품들은 영화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아이를 동반한 관람객들이 많은 것도 아마 달튼이 가진 독특한 특성들이 한몫했을 것으로 보인다. 우선 그림 자체의 매력도가 높다. 달튼의 작품은 윤곽선을 뚜렷하게 표현하지 않지만, 상당히 정돈된 느낌을 준다. 전체 화면 구성이 상당히 깔끔하게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메인 작품으로 전시된 부다페스트 호텔 삽화에서 충분히 그의 스타일을 파악할 수 있다.


군더더기 없는 화풍뿐만 아니라 담는 콘텐츠 역시 삽화가로서의 재능이 출중하다. 좋은 삽화란 자고로 나타내고자 하는 것을 정확히 한 장면으로 표현한 것이다. 하나의 삽화를 그렸다는 관점에서 달튼의 작품을 보면, 핵심적인 메시지를 담으면서 익살맞게 표현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영화가 펄프 픽션이건, 샤이닝이건, 스타워즈건, 달튼은 작품의 장면 장면을 무겁게 표현하지 않는다. 이런 깔끔한 작품과 메시지 덕에 사실 영화를 몰라도, 영화의 하이라이트를 포착한 장면에서 그 내용을 추론하는 것이 가능하다. 영화를 알고 있으면 기쁘고, 몰라도 유추하는 재미가 있다.


전시회를 나가면서 생각해보니 작가만큼 오래전 시절에 애착이 있는 사람은 드물 거란 생각했다. 그는 오래전 시절을 그리워하는 나이든 사람이었다. 하지만 다시 떠올려보니, 자기가 감상한 작품에 익살을 섞어서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그때를 상기시키는 작가의 마음이 왠지 어릴 적에 재밌는 만화영화를 보았다고 호들갑을 떠는 동네 친구랑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나도 그중에서 몇 개를 재밌게 보고 나니, 왠지 또 잘 놀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플랫폼처럼 알아서 나의 기호에 맞춰주지 않은 이 고전 작품들은 매력적이다. 여기까지 오니 왠지 또 이런 전시회가 서울 꼭대기에 남아있는 건 좋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만났던 '시네필'들은 사라지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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