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드게임 리뷰]
최근 보드게임을 좋아하는 지인 S와 이야기하다가 '게임화'란 무엇인가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이 이야기는 최근 유행하는 머더미스테리와 TRPG의 차이에 관해 이야기하다가 나왔다. 머더 미스테리는 많은 경우 보드게임으로 판매되지만, 플레이어의 이야기를 매개로 롤플레이로 진행되는 장르라는 점에서 TRPG와 비슷하다. TRPG는 '역동적 서사'에 초점을 둔 장르적 특성으로 인해 그 범주가 넓을 뿐만 아니라 룰자체가 TRPG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라 할 수 없기 때문에 보드게임의 하위분류로 두기 어렵다.
머더미스테리는 보드게임인가, TRPG인가? 애당초 TRPG는 보드게임인가? 이러한 질문은 자연스럽게 이들 장르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보드게임'과 얼마나 교집합을 가지는가에 관한 이야기로 이어졌고, 본질적으로 보드게임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특성인 '게임'에 대한 명확한 합의가 필요하다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당시 우리가 내린 결론은 '게임', 구체적으로는 input과 output이 명확한 알고리즘을 게임을 정의하는 최소요소로 두는 것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의 내가 아이디어를 조금 더 추가하여 '게임'의 의미를 약간 더 확장시킨다면-구체적으로 input의 의미를 확장시킨다면-, 오락적 목적으로, '게임 참여자의 행위가 포함된' 무언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게임의 시작과 끝은 언제나 게임 참여자의 행위에 있기 때문에 input은 고정된다. 이 데이터를 판정하고 다시 순환하게 하는 것이 게임의 구조인 output의 역할이다.
그래서 게임은 명확히 구분될 수 없는 종합예술이지만, 현시점에서 내가 내린 대략적인 가설은 이렇다. input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어떤 자유도를 가지고, 어떤 목적을 지지고 합산되느냐에 따라 '게임의 경험'이 달라진다. output의 주체가 누구이고, 어떤 자유도를 가지고, 어떤 보상이나 처벌로 주어지느냐에 따라 '게임의 구조'가 달라진다.
물론 이러한 구분은 실제 게임을 즐기는 데 있어서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 앞서 말했듯이 게임은 애당초 input과 output으로 구성된 하나의 알고리즘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상대적이고 임시적인 구분을 시도하는 이유는 게임을 더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편적인 즐거움을 분석하기 위해서다. 가설을 지니고 있으면 '즐거움'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예를들어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해왔던 놀이를 떠올려보자. 미끄럼틀을 통해 도망가는 도둑과 경찰 놀이는 단순한 승리-패배 조건을 가지고 있지만, 다양한 상황에서의 input이 가능하다. output이 부족하더라도 input의 경험이 보완할 수 있다. 컴퓨터 게임은 이 반대다. 플레이어는 제한적으로 행동해야 하지만, 컴퓨터의 정교하고 다채로운 output을 통해 더 많은 행위를 한 것처럼 느낀다. 잘 연결된 알고리즘은 구조에 대한 깊은 몰입을 가능하게 한다. 이 경우 output이 input을 보완한다.
처음 했던 이야기로 돌아가서 이야기해보자면, 이러한 관점에서 '머더미스테리'와 'TRPG'는 '보드게임'과 구분된다. 각 장르는 공통점을 중심으로 엮일 수 있지만, 경험을 처리하는 게임의 구조가 명확히 구분되어 플레이어는 제각기 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 구태여 이들을 카테고리로 넣고자 하면, 가장 위에 '아날로그 게임'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게임은 모두 특유의 알고리즘이 존재한다. 이 알고리즘을 분석하는 것은 게임의 즐거움에 영향을 미치지 않지만, 게임의 경험을 구체화한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이것이다.
'게임 모임'에 모인 이유는 제각각이지만, 나의 목적이 바로 이와 같다. "우리를 즐겁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오락행위란 무엇인가?"에 대한 나름대로 답을 찾는 것이다. 전자의 질문은 심리적인 것으로 영원히 대답할 수 없지만, 후자는 '게임'이라는 장르적 특성 내에서 설명할 방법이 있을 것이다.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다면, 오락은 더 오락다워질 수 있을 것이다. 글을 쓰기 위해선 오류를 감수하고 현상을 분리하고 해석해야만 한다. 조악한 가설이라 하더라도 오류를 수정하다 보면, 더 많은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이 된다.만 한다. 조악한 가설이라 하더라도 오류를 수정하다 보면, 더 많은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이 된다.
그런고로, 내가 첫 번째 모임에서 했던 게임들을 분석해보고자 한다.
1.라이헌트
'라이헌트'는 차이에 관해 이야기하다가 모든 플레이어가 스피커이거나 판단자가 된다. 차이에 관해 이야기하다가 시작되면 무작위로 섞인 대화 주제카드를 각 플레이어가 선택한 후 돌아가면서 진실이나 거짓을 이야기한다. 말을 하는 플레이어를 제외한 모든 플레이어는 그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를 판단하고, 그 판단에 따라 점수를 얻는다.
짤막한 설명에서 예상할 수 있듯이, '라이헌트'는 사적인 대화를 통해 가까워지는 일종의 아이스브레이킹류의 보드게임이다. '라이헌트' 류의 게임의 전략은 게임 내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플레이 간의 관계나 화술에 있기 때문에 전략의 확장성이나 리플레이성이 떨어진다. 하지만 애당초 그러한 것을 고려할 필요도 없이, 이런 류의 게임은 수련회에서 하는 진실 게임을 보드게임의 형태로 구현한 것에 가깝다. 게임 자체에 몰입하게 하기보다는 플레이어들 간의 이해나 현실에서의 사회적 관계에 초점을 둔 게임이다.
이 글에서는 이런 게임의 형태를 '대화덱 게임'이라고 부르겠다. '대화덱'이라는 단어는 내가 앞서 함께 언급한 S의 말에서 따온 것인데, 카드 게임 매니아인 그는 사람들과 상호작용할 때 일정한 대화 주제를 정하여 들고 다닌다고 이야기했다. 카드게임을 해본 사람이라면 왜 이것을 '덱'이라고 부르는지 이해할 것이다. 일정한 주제나 컨셉에 따라 빌딩된 카드들은 연계되어있지만 각 주제가 독립적이다. 할 말이 없을 때 플레이어는 카드 한 장을 꺼내 공개한 후 그 이야기를 나눈다.
이러한 대화 덱의 준비는 어색한 상황을 만들지 않으면서도 일정한 수준의 대화의 질 관리가 가능하다. 이러한 대화덱은 S처럼 명명하지 않더라도 아마 이미 많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일종의 사회적 스킬에 가까운 것이다(마치 소개팅 시 꺼낼 수 있는 주제들을 미리 준비해가는 것과 같다. 나는 심지어 잠자리에서 할 수 있는 흥분되는 말들을 정리해놓은 잠자리 게시물도 봤다. 이건 좀 웃기다.).
이 '대화덱'을 카드 등으로 실재감있는 파츠로 구성한다면 이런 '대화 덱 게임'이 된다. 머릿속에서 꺼내는 대신, 실제적인 촉감이 있는 카드와 코인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게임을 시작하기 전, 이날 함께 모임에 참여한 K는 이와 같은 게임으로 인터뷰를 진행해보고 싶다고 이야기했는데, 나는 그 말이 이 게임의 정체성을 꿰뚫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게임은 사회적 스킬로 합의되어있던 '대화덱'을 보드게임의 형태로 구현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끌어낼 수 있다. 사회적 상황이 게임이 되는 것은 우리에게 굉장히 편안한 느낌을 준다. 수많은 징조와 빌드업이 필요한 일반적인 대화상황과 다르게 곧장 도발적인 질문을 던질 수도 있다. 이 게임에 존재하는 블러핑 요소는 '이것은 게임이다'라는 상황을 만드는데 일조한다.
하지만 내가 앞서 기술한 대화덱 게임 류의 게임의 목적을 고려했을 때, '라이헌터'의 경험은 아쉽다. '대화덱 게임'이 목표가 플레이어들의 친밀한 관계 형성인 만큼, 게임의 구조보다는 덱 자체에 '좋은 대화 주제'가 많이 있는 것이 중요하다. '라이헌터' 의 대화 주제는 너무나 폭넓다. 예를들어 대화 주제 카드는 "나는 이런 이유로 이별해봤다"라는 식의 질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반적인 사람들 입장에서는 거짓말이 되었건 진실이 되었건 짧고 임팩트있게 이야기하는 것이 힘들 뿐만 아니라, 다른 플레이어들 입장에서 이미 완성된 사연의 진위여부를 파악하는 것이 어렵다.
나는 몇년 전 펀딩에 올라왔던 '하트헌터'가 좋은 모범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트헌터'는 레이즈 요소가 없다는 점을 빼고는 거의 비슷하지만, 질문이 직관적이다. 예를 들어 '하트헌터'는 "잠수이별 VS 바람 펴서 이별" 중 하나를 선택하는 식으로 대화카드를 구성했다. 판단자 역할을 수행하는 플레이어는 '라이헌터'에 비하면 추상적인 질문을 제시하기 때문에 사실 여부를 판단하기보다는 발화의 논리적 수준, 자신의 선입견, 그 사람의 인상 등을 고려하여 그 사람의 가치관을 추정하여 진위여부를 가릴 수 있다.
일반적으로 나는 이러한 게임에서 룰이 합리적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게임에서는 누가 승리하는지 중요하지 않다. 일반적인 대화 상황에서 나눌 수 없는 극단적으로 충돌하는 가치, 명확하게 갈리는 선택을 제시할 수 있는 대화카드, 보여지는 나와 숨겨진 나 사이의 전략을 세울 수 있는 룰적 장치만 잘 갖춰져도 게임은 훌륭한 재미를 선사한다. '라이헌트'는 이러한 부분에 신경 쓰는 대신 보드게임으로서의 배팅요소를 체계화시키는데 상대적으로 더 에너지를 쏟은 것 같다. 그래도 레드버튼이라는 체인점을 가지는가에 관한 이야기로, 이러한 보드게임을 내주려는 시도에 감사한 바다.
2.라스베가스
'라스베가스'의 플레이어는 개인 6면체 주사위와 딜러 6면체 주사위를 갖고, 턴이 돌아올 때마다 굴린다. 카지노에는 1부터 6의 숫자가 있는 카지노가 존재한다. 각 턴마다 굴린 주사위를 그 위에 올릴 수 있다. 단, 일부만 넣을 수 없이 나온 눈의 주사위를 모두 넣어야 한다. 각 카지노에는 무작위로 배정된 돈이 있다. 올려준 주사위 순위에 따라 그 금액을 나눠 가지되, 동률이면 주사위가 없는 것으로 친다.
'라스베가스'는 단순한 룰임에도 불구하고 아주 훌륭한 게임이다. 이 게임을 이끌어가는 기본적인 장치는 무작위 성이다. 개인적으로는 '다이스요트/얏지'와 비슷한 재미가 있는 게임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러한 게임들이 '행운 도박' 유형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행운 도박 게임'은 더 많은 보상을 얻기 위해 더 큰 위험을 감수하거나, 손해를 줄이는 판단이 요구된다. 큰 보상을 위해 기다릴 것인지, 아니면 손해를 줄일 것인지 끝까지 판단이 강요되는 게임인 마작류 게임이나 렉시오와 같은 게임과 다른 점은, 패가 아니라 주사위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다른 사람의 패를 상대적으로 덜 고려한다는 점이다.
간단한 룰로 구성된 게임이지만,게임에서 다양한 전략적 상황에 놓일 수 있다. 이러한 전략적 상황은 게임 내에서 의도된 것이다. 이 게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기본적인 요소는 다음과 같다. 첫째, 주사위의 무작위 성을 고려하여 최대 금액을 먹고자 하는 나 자신의 전략. 둘째, 위와 같이 설계된 타인의 전략. 셋째, 나와 타인의 주사위 개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딜러 주사위.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은 주사위의 무작위 성에 의해서 계속 변화할 수 있다.
'요트 다이스/얏지'가상대적으로 개인의 점수의 최대화에 초점을 맞추는 게임인 반면, '라스베가스'는 나의 점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타인과의 경쟁과 새로운 변수를 만들어낼 수 있는 딜러 주사위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게임이다. 행운과 상황적 역동성에 기대는 라스베가스는 몇 번 하다 보면 금방 질리는 게임이지만, 특유의 쉬운 진입 장벽과 누구 하나 얼굴 찌푸릴 일 없는 훌륭한 파티 게임이다. 이것이 '라스베가스'가 어느 보드게임 카페에 가도 살짝 닳아있는 이유, 고전 명작인 이유다.
3.바퀴벌레 포커
바퀴벌레 포커는 8종류의 귀여운 혐오 동물의 캐리커처가 8장씩 총 64장 있는 게임으로, 카드를 잘 섞어 각 플레이어가 나눠갖는다. 플레이어는 카드를 한 장 꺼내 뒤집어 놓고, 다른 플레이어에게 하나의 생물유형을 선언한다. 받은 플레이어는 그 카드를 확인하여 다른 플레이어에게 같은 질문을 하거나, 참 거짓을 선언한다. 답이 많은 사람이 제시한 플레이어가 공개하고, 많은 사람이 받은 플레이어가 공개한다. 같은 종류의 생물이 4장 이상이 되면 그 플레이어는 패배한다.
'게임 모임'의 첫날인 만큼, 이날은 쉬운 게임을 위주로 진행했다. '라스베가스'가 '행운 도박'게임의 입문 게임이라면, '바퀴벌레 포커'는 '블러핑 게임'의 입문 게임이다. 입문 게임으로 적합한 것이 무엇인가? 나는 한 장으로 요약할 수 있지만 다양한 상황을 만들어낼 수 있는 알고리즘을 가진 게임을 '쉽고' '재밌는' 게임이라고 본다.
개인적으로 이 게임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는 혐오동물이라는 컨셉이다. 기본적으로 이 게임은 까지 않은 카드를 건네받는 것을 걱정하는 구조로 구성되어 있다. 같은 혐오 동물이 네 마리가 되면 패배한다. 그래서 제시받는 플레이어는 마치 카드를 까면 징그러운 바퀴벌레가 튀어나올 것처럼 걱정된다. 이런 게임 플레이 방식에 맞게, 게임은 혐오생물 아트워크를 채용했다. 그래서 징그럽고 유쾌한 아트워크는 이 게임의 매력의 배가시킨다.
이런 테마의 훌륭한 뿐만 아니라,단순한 블러핑 요소에 논리적 전략을 요구한다는 점도 주목할만하다. 예를들어 A가 B에게 카드를 건네는 상황에서 B가 바퀴벌레 3장을 공개하여 가지고 있다면 전략이 사용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A가 "바퀴벌레야"라고 이야기하면, B는 그것을 공개하여 가져오는 것을 꺼리기 위해 '참'밖에 대답하지 못한다. '참'인 경우, 바퀴벌레라면 상대에게 돌아갈 것이고, 바퀴벌레가 아니라면 가져와도 상관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짓'이라고 대답했는데 바퀴벌레라면 패배하게 되고, 바퀴벌레가 아니라면 상대가 가져간다. 따라서 '참'밖에 대답할 수밖에 없지만, 이러한 상황을 이중으로 속일 수도 있다.
게임은 기본적으로 카드 카운팅 뿐만 아니라 논리적 사고를 요구하지만, 블러핑 요소를 통해 다양한 상황을 연출할 수 있다. 앞서 말한 상황에서 '참'만 대답하는 플레이어는 바퀴벌레뿐만 아니라 더 많은 카드를 모으는 표적이 될 수도 있다. 블러핑 게임이 그러하듯이 게임이 진행됨에 따라 표적이 되어 반목할 가능성이 존재하지만, 입문자뿐만 아니라 숙련자에게도 즐거운 경험을 제공할 수 있는 게임이다.
하지만 이러한 간단한 알고리즘으로 구성된 게임은 제한된 상황만 연출하게 되기 때문에 계속해서 플레이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런 게임이 즐거웠다면 한번 손대보는 게 어떨까? 다음에 시간이 된다면 덱빌딩 게임들도 소개해주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게임 모임 여러분, 도미니언 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