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무용 '내가 물에서 본것'
물질은 형태와 모양을 바꿀 수 있지만, 그 총질량은 바뀌지 않는다. 물질은 다양한 환경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변화한다. 변화한 모든 것들이 그 물질이지만, 변화무쌍하다는 사실은 그만큼이나 취약하다는 것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취약하고 변화무쌍한, 가장 근거리에 있는 물질 중 하나는 물(몸)이다. 나는 물을 통해 무용극에 관한 리뷰를 쓴다. 무용극을 보았던 것도 나의 눈, 그 기억을 쫓고 기록하기 위해 키보드를 치는 손끝, 모두가 감각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몸이 있다. 이것은 모두 물이 한 것이다.
애당초 물 없이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존재한다는 사실을 감각을 통해 알 수 있고, 감각을 통해 해석해낸 정보들로 관념을 만들어 낸다. 이처럼 개인의 내면이나 타인과 공유된 정신세계에서 몸은 변화하며 실제 존재를 쉽게 벗어난다.
그렇다면 어디까지, 혹은 어느 부분까지를 몸(물)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 몸을 바라보는 나 자신, 그 몸을 평가하는 외부 사람들, 그 몸을 문화로 만드는 문명, 나의 몸과 명확하고 작은 링크를 가지고 있는 것들은 어디까지가 물일까? 애당초 이것을 구분할 수는 있을까? 그것이 대단히 유용한 일이기나 할까?
내가 감상한 무용극, '내가 물에서 본 것'은 이러한 질문에서 시작한다. 몸을 통해 우리는 존재의 범위를 정의하고, 실체로서 타인으로부터 정의된다. 하지만 우리의 정신세계는 본질적으로 변화무쌍한 역동성을 지닌 것이기 때문에, 외부의 작은 영향, 상상력, 기술만으로 손쉽게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한다. '나'의 존재가 나의 신체에 종속되지 않은 것처럼, 그 근간이 되는 '몸'도 끝없이 변화한다.
그리고 그 변화는 깔끔한 인과관계나 점선이 그려진 파이처럼 예측가능하거나 분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치 작품 소개 책자에서 소개한, 오토 슈테른과 발터 게를라흐의 양자자석 실험이 의식도 하지 못한 피운 싸구려 시가 성분으로 인해 실험의 결과를 확인하게 만든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여성의 몸은 어떨까? 여성의 몸은 다양한 방식으로 정의되어 왔다. 아름다운 몸, 임신하는 몸, 수유하는 몸, 출산하는 몸은 반대로 아름답지 않은 몸, 임신하지 못하는 몸, 수유하지 못하는 몸, 출산하지 못하는 몸을 만들었다. 실천적인 사상과 행동 강령이 되기 위해, 그 몸들은 언제나 너무나 명확한 형태로 우리들 입에 오르내렸다.
하지만 이런 몸들은 몸의 일상을 포착하지 못한다. 우리 몸 안에는 전자도 후자도 존재하지만, 일상을 사로잡는 것은 좀 명확하지 않고 사사로운 것들이 많다. 이런 몸들에 집중하다 보면 살짝 접힌 팔꿈치나, 다리를 살짝 폈을 때 나는 소리나 다리에 미세하게 움직이는 벼와 근육처럼, 갑자기 신경 쓰이는 이마 위의 머리카락처럼 때로는 일상에서 느끼는 몸과 관련된 모든 경험들이 소외당한다. 사실 그런 것들이 싸구려 시가처럼 작용하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예술가의 일은 언제나 생략된 것을 집요하게 찾아내는 데 있다. '내가 물에서 본 것' 역시 또 다른 시작점을 안무가의 난임 치료에서 느낀 미세한 부분에 둔다. 몸은 사회가 아닌 병원 앞에서 새롭게 정의된다. 병원에서 보통 몸은 치유되어야 할 증상, 병으로 재단된다.
여성이 임신하는 과정은 여성에게 수많은 심리적 변화를 가져다주지만, 난임 '치료'는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기술의 실현 장소에 불과하다. 기술로 다시 진술되는 나이나 영양, 체력이나 돈과 같은 것들은 때로는 내부의 목소리와 맞물려 색다른 경험을 하게 한다. 이 미세한 부분은 기술과 실천의 이름에서 소외되어 왔다.
하지만 미세하지만, 분명히 작용하는 것들을 우리는 늘 인식하고 있는지를 떠나 함께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기술에 재단된 것들에 의해 결코 사라지거나 먹히지 않는다. 몸을 이용한 예술가인 안무가는 인지되지 않는 그 찰나를 포착하고자 했고, 그 결과로 인식되는 것과 미인식되는 것의 역학을 반대로 바꿔버린 이 흥미로운 작품이 탄생한 것이다.
'내가 물에서 본것'에는 울퉁불퉁한 종기가 잔뜩 달라붙은 것 같은 옷을 입은 안무가들이 등장한다. 처음 그들은 파란색 테이프가 붙은 거울 위를 질질 끌고 움직이면서 기묘한 소리를 낸다. 거울의 미끄러운 표면과 테이프가 벗겨지는 소리, 테이프와 살이 문지른다. 테이프가 벗겨지면 거대한 거울이 드러난다.
처음에 몸은 소리를 통해서 존재감을 드러내지만, 거울이 드러난 순간부터는 거울에 문댄 흔적과 거울상처럼 비추는 모습으로 존재감이 드러난다. 테이프로 개봉되는 듯한 거울, 거울에 비친 살색의 몸, 그 위를 비추는 밝은 빛은 극장보다는 수술대를 연상하게 한다. 하지만 그 거울의 모습은 기술적 반영만 하는 차가운 기술이 아닌, 다양한 몸들이 오가는 성찰의 무대로 표현된다.
안무가들의 전반적인 표현 양상에서 개인적으로 주목했던 것은 두 가지였다. 첫째, 안무가들은 일반적인 무용에서 기대하는 각 잡힌 모양으로 움직이는 대신, 마치 현미경 위의 생물처럼 서로 엉겨 붙듯 움직인다. 기본적으로 하나의 덩어리처럼 여러 안무가가 움직이면, 몇 명의 안무가는 다른 방식으로 춤춘다.
병원에서 들을 수 있는 소리와 일상 소리를 과장하거나 축소한 소리 속에서 움직이는 안무가들은, 개인적으로 단일한 경험 속에서도 수많은 감각과 감정을 느낀 안무가의 느낌을 표현하는 것처럼 보였다. 때로는 뭉쳐서 인식할 만한 감정으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뭉쳐서 인지되는 감정 외에도 파편화된 조각처럼 떠다니기도 한다.
두 번째, 몸의 '물'을 적극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사실 이 부분은 연출가가 어느 정도 말장난을 의도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 작품의 제목이 물질의 물이 아닌 액체인 그것을 연상하게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 작품에서는 입안을 물로 헹구고 뱉는 행위가 여러 차례 등장한다.
병원에서 입을 헹구는 일을 표현했다고 표현에 기대 해석할 수도 있지만, 책자의 '물의를 일으키고 싶다'라는 표현과 더불어, 마치 침처럼 그것을 뱉는 행위는 상당히 도발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우리의 몸이 명확하지 않은 일상적인 것이면 언제나 생략되고 숨겨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입 안의 물을 뱉는 행위는 마치 오줌을 흘린 것처럼 사회적으로 불편하게 느껴지곤 한다. 그것을 전면에 내세운 안무가들에게 행위 하도록 하고, 서로에게 흘리는 행위에는 어떤 결연한 의지 같은 것이 느껴지기도 한다.
거울 앞에서 몸의 이곳저곳을 열어보는 안무가, 계란을 이고 굴리는 안무가, 떨어진 계란을 신경질적으로, 때로는 신나는 것처럼 던져버리는 안무가, 이 작품에는 우리가 인식하지 않으려고, 혹은 않았던 것들을 약간은 유머스럽게 느껴질 만한 방식으로 표현한다.
여성의 몸을 경험한 사람으로 이 작품의 경험이 어땠냐고 물어본다면, 우선 진짜로 힘들었다고 이야기할 것 같다. 한 쪽에서 연약한 계란을 굴리는 것도, 거울 앞에서 몸을 잡아당기는 것도, 엉겨붙고 때로는 홀로 폭자하는 몸들도 모두 일상에서 여성들이 느낄만한 섬세한 표현들이다. 지나치게 확대된 세포들처럼, 이 작품은 아름다운 만큼, 쉽게 이해할 수 없는 퍼포먼스로 역전된 노이즈로 관객들에게 고통을 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작품이 끝나고 나니 뭐라 말할 수 없는 연대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작품의 긴 터널 끝에서 빠져나온 것처럼, 커튼콜 마지막으로 인사하는 안무가를 보니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뭉클한 마음이 들었다.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전달하기 위해(넌센스다. 이것은 무용극이고, 잘 인식되지 않는 것을 다루기 때문이다) 책자의 긴 글을 완성해야 했던 그 마음, 이 작품에서 달콤하지도 않고 힘겹기까지 한 것들을 표현하고 부정하지 않기 위해 깊은 곳까지 다녀왔을 그 여자의 마음이, 정말 중요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