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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r Kim Aug 27. 2024

피할 수 없는 바다

첫 언어를 배운다는 것

12살 첫째가 자리에 앉으면서 옆자리에 있는 9살 여동생의 볼을 톡 건드린다. 딸은 역정을 낸다.

"Hoo, why did you touch Jee's face?" 아들, 동생 볼 왜 건드리는거야?

"Because she's cute" 귀여워서

"Your sister doesn't like that." 안좋아하잖아

"I saw you stroking her on the cheek, why can't I?" 아빠도 하던데 왜 나는 안돼?


아니, 아빠는 동생이 기분 좋을때 분위기 봐서 하는거지.

상대방이 싫지 않을때 애정표현을 하는 거지 너는 그걸 모르니.


아이들은 쉽게 배운다. 한번씩 이 사실이 무섭게 느껴질 때가 있다.


아들이 태어났을때부터 'hi'를 했다. 우리말은 가급적 쓰지 않으려고 굉장히 많은 노력을 했고, 지금도 하는 중이다. 아이가 아주 어렸을때에는 사실 아이가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 아빠들은 아이가 마치 대답을 하는양, 본인이 자문자답을 하면서 어떻게든 아이의 말을 이끌어내려고 한다. 아이가 '엄마, 아빠'를 하는데 거의 1년이 걸리는데도 불구하고 그 사이에 그런 반쪽아닌 반쪽 대화는 끊임없이 오간다.


아이들에게 내가 건네는 말은 아이에게 쌓여서 아이의 언어가 된다. 나는 이 사실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아이를 낳은적도 키워본적도 없던 새내기 아빠인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았는지는 정말 설명하기 난감하다. 내가 영어를 배우면서 느낀것들과 영어교육학을 전공하며 이리저리 주워담은 이론들과 그동안의 수업 경험들의 신묘한 결합이 내적 확신을 주었다고나 할까. 


내가 아이에게 주는 말은 빗물과 같다. 아이의 땅에 흐르는 빗물의 태반은 나와 나의 와이프의 입에서 떨어진 것들이고, 그 빗물은 아이의 귀로 머리를 흘러가 아이의 언어의 바다가 된다. 그리고 그 바닷물이 어느정도 차올랐을때 다시 아이의 입을 통해 비로 내리고, 그 비는 내 귀를 타고 내게 들어와 내 언어의 바다에 함께 들어간다. 이렇게 아이와 나와 와이프는 서로의 바다에 비를 뿌리며 함께 언어의 세계를 만들어간다.


나에게는 이런 언어적 세계관의 확신이 있었다.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그 언어가 제공하는 거대한 체계를 수정없이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우리는 내가 언어를 선택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나는 한국에 태어나서 한국어 화자들에게 둘러쌓이면서 한국어의 바다에 빠뜨려진 것이고, 나는 강제로 한국어 화자로 길러진 것이다. 내가 만약 한국어가 가진 체계를 거부하고 나만의 체계를 고집한다고 생각해보자. 나는 지금부터 한국어가 가진 모음체계를 거부하고 모든 '어'를 '우'로 바꾸어 말할 것이다. 

우떤구 지금 내말이 누무나 명확후게 이해되지 욿는구? 글을 읽는 독주들은 나를 운우치료가 필요한 사람으로 판단할 것 같다.(어떤가 지금 내말이 너무나 명확하게 이해되지 않는가? 글을 읽는 독자들은 나를 언어치료가 필요한 사람으로 판단할 것 같다.)


결국 아이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우리아이에게 영어의 비를 뿌리면 아이의 대지에는 영어의 비가 내리고, 영어의 바다가 것이다. 아이에게는 원래 선택권이 없으므로 강제라고 할 것도 없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자연스럽게 모여 강이 되고 바다가 되듯, 그냥 쉬이 흘러가 영어의 바다가 형성될 것이다. 나에게는 그런 확신이 있었다. 가장 강제적인것 같지만, 매우 아이러니컬하게도 가장 강제적이지 않은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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