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를 잘 못하는 사람들은 흔히 문법을 몰라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영어를 잘하게 해 주겠다는 학습법들을 보면,
1) 한국말에 해당하는 딱 떨어지는 영어 표현을 가르쳐주거나(예를 들어, "억울하다, 눈치 없다, 배고파 죽겠다")
2) 쉐도잉 등으로 그대로 반복해서 따라 하면 발음과 악센트를 고칠 수 있다고 하거나
3) 문법을 설명한다.
세 가지 방법들은 다 나름의 효용이 있다. 영어학습에 있어서 절대적인 한 가지 방법을 고집하는 것 자체가 위험한 일이다. 다만, 각 방법에 대해서 생각해볼 여지는 있다.
이 세 가지 중에 가장 와 닿는 것이 3) 번이 아닐까 한다. 문법을 잘, 차분히, 시원하게,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주는 것은 일단 한국사람이 가장 잘하는 일이다. 한국사람처럼 문법을 잘 설명해주는 사람이 있을까? 학교에서 그렇게 배웠고, 시험도 그렇게 많이 쳤는데? 선생님들도 가장 쉽게 잘 자신 있게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 문법이다. 너무나 많이 단련되었기 때문이다.
배우는 사람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많이 배웠기 때문에 끌린다. 역설적이겠지만, 사람은 자기가 익숙한 것에 쉽게 호감을 느낀다. 학교에서 그렇게 배웠지만, 지금까지는 제대로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잘 모른다고 생각하고, 잘 가르쳐주는 사람을 만나면 문법을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유튜브 등에서 문법을 들고 나오는 강사들을 보면 문법이란 말을 피하고 말의 뼈대이니 말의 짜임이니 하면서 문법 색채를 빼고 말하기도 한다. 아니면 문법은 사실 정말 필요한 것인데 그동안 쓸데없이 자잘한 것을 배웠기 때문에 잘 못했을 뿐이라고 자기는 필수적인 것을 쉽고 빠르게 가르쳐주겠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문법 설명에 다시 끌리는 이유는 문법이"체계적인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8 품사를 배우고, 주어와 동사를 배우고, 5 형식을 배우고, 의문문 만드는 법을 배우고, 단문에서 중문 복문으로 가는 길을 "차근차근"배우면 "차근차근" 향상되는 느낌이 있기 때문이다. 문법은 논리적 설명이라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단계별 학습이 가능하다. 배우는 사람 입장에서는 이렇게 '쉬운'것에서 '어려운'것으로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배울 내용이 제시될 때,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고, 잘 배우고 있고 잘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의 영어는 문법 체계가 없어서 문법을 못하는 것이며, 이것을 완벽하게 만들면 말도 글도 자연스럽게 나올 것이라 예상한다.
그런데 정말 우리가 문법을 '몰라서' 그런 걸까? 내 문법이 '엉망'일까?
여러분들의 영어는 이미 문법 체계가 잡혀있다. 영어교육학에서는 이를 'Learner Language'라고 한다.
영어를 아주 처음 배울 때에는 문법이고 뭐고 없겠지만, 어느 정도 배움이 진행되면 사람은 다 나름의 영어문법 체계를 자기 안에 갖추게 되는데, 이 체계는 모국어와도 원어민의 영어와도 다른 자신만의 체계이다. 이 체계가 원어민 쪽에 상당히 가까운 사람도 있겠지만 모국어에 가까운 사람도 있다.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내가 영어를 잘 못한다고 해서 '아무렇게나'영어를 발사하는 것이 아니라, 내 나름의 규칙에 의해서 영어를 발사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이렇게 해서 영어를 발사하면 내 문법이 원어민의 문법과 같은 부분은 제대로 된 영어가 나오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은 부정확한 영어가 나오게 된다. 내 문법이 비어있는 부분(원어민 문법과 다른 부분)은 나머지 부분이 대체하게 되는데 이때 1) 모국어의 문법 체계를 빌려오거나 2) 자신의 영어문법에서 다른 부분을 빌려오게 된다.
7살짜리인 우리 아들은 나와 영어로 대화한다(우리 아들은 그냥 집에서 영어를 배웠다. 해외 경험이 없다). 아들의 말을 들어보자.
"When you was 7 years old like me, did you speak English well?"
이 문장의 바른 표현은 "When you were 7 years old like me, did you speak English well?"이다. 왜 이런 현상이 생긴 것일까? 내가 추측하기로는 "When I was"라는 구문이 확실하게 자리 잡혀 있고, 이 말이 익숙한데 주어를 you로 바꾸면서 에러가 생긴 것이다. 즉 우리 아들은 am의 과거형은 was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are의 과거형은 were이라는 것을 아직 배우지 못했다. am과 are의 차이는 알지만 이 둘의 과거형의 차이는 모른다. 그래서 "be동사의 과거형을 써야 한다-->그 과거형은 was"라는 규칙에 의해서 저 문장을 생성한 것이다. 이는 우리말이 영어에 영향을 준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갖고 있는 나름의 영어문법을 확대 적용한 것이다. 이를 overgeneralization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발생하는 에러를 영어를 배우는 사람 입장에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첫 번째 해법은 에러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배우는 사람 입장에서는 에러를 피할 수 없다. 내가 가진 문법 체계가 영어와 비슷해지는 데에는 매우 오랜 시간이 걸린다. 나는 원어민에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부분 무리 없이 전달할 수 있고, 학생들도 오랜 기간(실력에 관한 민원 없이) 잘 가르치고 있고, 토익 만점도 받아봤고, 통번역도 꽤 해봤지만, 내 발화에도 오류는 피할 수 없다. 피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고 받아들여야 한다. 비가 오면 우산을 쓰고, 눈이 오면 차를 두고 출근하듯이, 당연한 것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두 번째 방법은 최대한 에러를 피하는 것이다. 이길 수 없다면 피하라고 하지 않는가? 에러를 피하려면 '포기해야'한다.
며칠 전 수업하면서 받은 질문이다.
학생: 선생님 '주종관계'가 영어로 뭐예요?
나: 글쎄... master and slave relationship? 아니면 그냥 slavery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
나중에 찾아보니 master-servant relationship이었다. 그런데, 영어를 어려워하는 사람일수록 이렇게 우리말 표현에 딱 떨어지는 영어 표현을 찾는다. 그러다 보면 매우 어려워진다. 에러를 피하면서 자신의 말을 영어로 전달하려면, '자기가 알고 있는 문법 체계 안에서만'말을 하는 습관을 들이면 된다.
다음 문장을 영어로 해야 한다고 생각해보자. 그리고 이 문장을 영어로 하는 나는 5 형식도 아니고 3 형식까지만 알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무조건 1 형식, 2 형식, 3 형식 안에서 이 문장의 뜻을 전달하려고만 생각하는 것이다. 아래 문장은 우리나라 신문의 영문판 기사에서 따온 것이다.
"영국에는 졸업생 넥타이라는 것도 있다. 출신 학교의 상징으로 취직 면접 때 맨다. 굳이 학력을 안 밝혀도 시험관들은 넥타이만 보고도 출신 학교를 알아차린다. 이런 학벌사회가 없다."
"In UK there is a tie for graduates.
If you see the tie, you know the college. You wear it for job interviews. You don't have to talk about your college. They will figure out your college. You can see. Colleges are really important in UK."
문장은 그대로 두고 주어와 순서만 조금 바꿔보자.
"In UK there is a tie for graduates. You wear it for job interviews. You don't have to talk about your college. The interviewers see the tie, and they figure out your college. You can see. Colleges are really important in UK."
위 영어문장을 보고 우리나라말의 원문이 그대로 전달되지 않았다고 불평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결국 하고 싶은 말은 '영국에서는 넥타이만 보고 취직할 때 그 사람 출신학교를 알 수 있으니, 출신학교는 중요하다'는 것이다. 잘 전달되지 않았는가? 신문의 (전문가가 번역한) 영어원문은 이렇다.
"In the United Kingdom, male students have ties that represent their alma mater, which they wear for job interviews. They don’t have to explain their academic background because it is already around their neck."
위의 3 형식 번역문과 비교하면 learner language의 수준 차이가 많이 난다. 신문 번역가의 영어에는 복문이 있다. 관계대명사를 써서 문장을 간단히 하고(which they wear for job interview), 모교(alma mater)와 학벌(academic background)이라는 표현도 딱 떨어지게 쓰고 있다. 그래서 오히려 전체 길이는 간결하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이런 화려 무쌍한 문법구조를 쓰지 않고도, 3 형식 문장만으로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학습자다. 전문 번역가가 아니다. 하고 싶은 말을 오해 없이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지, 화려 무쌍하게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 물론 계속 계속 유치하게 말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내 learner language에 맞춰서 말하고, 내 배움이 진행될수록, 더 어려운 문법이 익숙해질수록, 점점 더 화려하게 말하면 된다.
결론은, 메시지에 집중하고, 화려한 구조를 포기하라. 내 문법구조를 다급하게 바꾸기보다는 영어의 문법구조를 단순화시켜야 한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paraphrasing이다. 똑같은 말을 약간 단순하게 다시 표현하는 것. 그러려면 하고 싶은 말의 '메시지, 핵심'을 파악해야 한다. 핵심을 전달하고, 찰진 표현은 포기해야 한다. 결국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야 하고, 다른 쉬운 말로 표현하면 어떻게 할지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국어를 잘해야 영어를 잘할 수 있다는 말은 어느 정도 유효하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런 학벌사회가 없다"라는 문장은 번역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