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바이링구얼로 아이를 키울 생각을 하게 되었는가
나는 우리아이가 한국말만큼 영어를 잘하는, 아니 어떻게 보면 영어만큼 한국말을 잘 하는 완벽한 이중언어 사용자로 성장하기를 바랬다. 의대와 이과 열풍이 불고있는 요즘은 영어 열풍이 조금 가라앉은 느낌이기는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좋은 대학을 가고, 좋은 직장을 잡는데 영어가 중요하다는 생각만큼은, 그 중요성의 크기는 서로 다르게 체감한다하더라도, 중요성만큼은 다들 공감할 것 같다.(물론 좋은 학교와 좋은 직장의 의미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고, 그 생각에 따라 영어가 쓸모없는 도구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다 해도 원어민이 아닌 내가 역시 원어민이 전혀 아닌 아내와 함께 순전히 한국에서 내 아이를 완벽한 이중언어사용자로 키우고 싶다는 나의 생각은 미친 집착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따가운 시선에서 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나의 프로젝트에 대한 변명이 필요할 것 같다.
내게 영어는 위대한 개츠비가 웨스트에그에서 바라보는 이스트에그의 초록 불빛이다. 개츠비가 한때 차지할 수 있었던, 이제는 다른 남자와 결혼해버린 데이지가 사는 이스트에그 흘러나오는 불빛. 이제는 재력으로 무장한 개츠비가 돌아와 자리잡은 웨스트에그에서, 데이지가 사는 이스트에그를 바라볼때 반짝이는 불빛. 데이지를 가지고 싶다는 희망으로 쳐다보는 불빛. 마치 가질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사이에 바다가 가로막혀있는 곳. 바다건너 가볼수도 닿을 수도 만나볼 수도 있지만 아직 내것이 아닌 초록 불빛. 그러나 계속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아니 아직 내것이 아니어서 바라볼 수 밖에 없는 그것.
나는 한국에서 나고 자란 토종 한국인이다. 어릴때부터 영어를 배운것도 아니고 그냥 중학생이 되기 몇 달 전부터 동네학원에서 영어를 접했다. 그러니까 정식으로는 중1때부터 영어를 배운 셈인데, 중학교 2학년때 학교에서 너무나 훌륭한 영어선생님을 만나서 영어에 흥미를 느꼈다. 선생님께서는 영어는 결국 말을 주고받는 커뮤니케이션 도구이며, 이를 위해서는 대화를 해야한다며 영어회화학원을 권하셨고, 나는 당시로서는 드물던(나이가 나오는 것 같아 부끄럽다) 영어회화학원을 중학생때 다녔다. 나는 영어회화가 너무 재미있었고, 재미가 있으니까 영어는 나의 아이덴티티가 되었다. 회화는 물론이고 문법과 독해도 열심히 했다. 대학도 영문과로 대학원도 영어교육과에 진학을 했다. 그리고 고등학교 영어교사가 되었다.
나는 두군데의 고등학교를 거쳐서 경기도의 한 외고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나는 첫 수업은 보통 100퍼센트 영어로 하는 편이다. 학생들에게 영어가 문법 독해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커뮤니케이션 도구라는 내 철학을 전달해주고 싶기도 하지만, 사실 ‘나 영어 잘하는 영어교사다’라는 긍정적인 인상도 남기고 싶기도 하다. 외고에서의 영어수업 첫날, 내 소개를 하고 수업 오리엔테이션을 영어로 한뒤 학생들에게 선생님께 부탁하고 싶은 말을 써서 내보라고 했다. ‘You might want to speak a bit faster’이라고 쓴 학생이 있었다. 좀 더 빨리 말해달라라니, 보통은 무슨말인지 모르겠으니 천천히 말해달라는 부탁은 받아봤어도, 더 빨리 말해달라는 부탁은 처음이었다. 그 학생이 어떤 마음으로 썼는지 모르겠지만 내게는 충격이었다. 마치 ‘너 영어 잘하는 것 뻐기지 마라, 별것도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물론 나의 자격지심일지도 모른다. 정말 내 말이 느렸을 수도 있으니까.
외고의 학생들이라고 다들 원어민처럼 영어를 하는 것은 아니다. 회화만 잘하는 친구, 문법만 잘하는 친구, 문법이나 독해만 강한 친구, 영어자체는 흠잡을 데가 없는데 그냥 우리말이든 영어든 어려운 글을 해석하는 능력이 부족한 친구 등, 각각 잘하는 영역이 다른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영어토론대회를 열어서 심판을 하다보면 정말 그 어려운 주제들에 대해서 속사포처럼 영어로 말을 쏟아내는 친구들이 많았다. 솔직히 나보고 그 자리에 서서 해보라고 하면 절대 그렇게 못할 것 같았다. 물론 축구 심판이 축구선수보다 축구를 잘할 필요는 전혀 없다. 그렇지만 나는 그 영어토론심판관으로서 그 자리에서 나보다 훨씬 뛰어난 퍼포먼스를 보이는 학생들을 심사한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그들보다 더 잘하지는 못해도 어느정도 보조는 맞추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영어 선생인데.
영어로 끝장을 보고 싶었다. 내게는 토익 만점 성적표도 있었도 토익 스피킹 라이팅 최고등급 성적표도 있었고, 발음이 괜찮다는 학생들과 주변의 칭찬도 있었지만, 내가 부끄러웠다. 영어로 말할 때 그 묘한 느낌이 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어느정도 전달할 수 있고, 전달할 수 없다면 사전이라는 도구를 쓰면 충분히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무언가 그 찜찜한 느낌은 늘 어쩔 수 없었다. 영어를 말할때 그냥 영어가 나오는게 아니라 무언가 우리말의 끊임없는 방해를 받는 느낌이랄까. 마치 간단한 수학문제를 머릿속으로 풀고 있는 느낌. (3x4)+5를 머릿속으로 충분히 계산할 수 있고 어려운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듯한 그 불편한 느낌이 나는 싫었다. 영어회로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말이 끊임없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그 느낌이.
나의 아들에게는 이러한 느낌을 주고 싶지 않았다. 영어를 그냥 영어로, 우리말은 그냥 우리말으로, 하나가 나올때 다른 하나의 간섭없는 상태를 만들어준다면, 내가 이루지 못한 원어민의 꿈을 이룰 수 있지 않을까? 그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배운 약간의 영어교육학적 지식과 내가 겪었던 좌절을 피해가야 한다. 그러려면 처음부터 영어를 우리말과 같이 넣어주어야 한다.
맞다. 이 프로젝트는 아이에게 자신이 가진 가장 좋은 것을 물려주고 싶은 한 아빠의 노력이다.
아니다. 이 프로젝트는 영어를 정복하고픈 꿈을 자식에게 대리 투사하는 한 아빠의 집착이다.
맞을 수도 아닐 수도 있다. 희망과 절망, 교육과 압박, 배려와 집착 사이에서 나는 끊임없이 내 자신을 되돌아 봐야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아내와 친구들 주변의 시선, 내가 통제할수 없는 변인들이 늘 함께 했다. 그리고 이 긴장감은 지금도 항상 함께하고 있다. 그래서 이 방법을 "섣불리" 권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누군가는 나와 비슷한 생각으로 초록불빛을 바라보고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나보다는 조금더 편하고 행복하게 이 길을 갈 수 있기를 바란다.
초록 불빛에 함께 닿기를 바라면서.